스포일러 방지 원했던 ‘어벤져스 엔드게임’ ‘기생충’
스포일러 방지 원했던 ‘어벤져스 엔드게임’ ‘기생충’
  • 이형중
  • 승인 2019.06.17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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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외과 의사의 영화 이야기(12)

이 형 중
한양대병원 신경외과

‘스포일러(spoiler)’는 영화, 소설, 애니메이션 등의 줄거리나 내용을 예비 관객이나 독자 특히 네티즌들에게 미리 밝히는 행위 혹은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따라서 소위 ‘망쳐버리는 사람 또는 그 행위’라는 의미를 가지며, 잠재관객에게는 흥을 깨는 훼방꾼이자 작가나 제작자에게는 잠재적 관객 수를 잠식하여 흥행을 떨어뜨리는 원망스러운 존재이기도 하다. 최고의 반전 영화로 회자되는 <식스 센스>에서 그가 사람이 아닌 유령이었다는 사실에 영화도 보기 전에 멍해졌고, 고2때 야간자율학습시간에 나와 재개봉관(천장이 뚫려 운치있는 빗물이 바닥을 적셨고 게이가 활보했었다)에서 보았던 <대부(1편인지 2편인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는 등장인물이 나올 때마다 술 취한 관객이 담배연기를 풍기며 “저 xx 곧 죽어.”라는 친절하기 그지없는 해설을 할 때 살의를 느낄 정도였다(옛날에는 담배 펴도 되는 극장이 있었다). 최근 압도적인 관객몰이를 한 두 편의 영화는 모두 스포일러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며 절대 줄거리를 발설하지 말 것을 관객에게 신신당부했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은 지난 11년 간 숨가쁘게 달려왔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라는 대단원의 종착점이자 또 하나의 시발점이면서, 어지럽게 널브러졌던 큐브를 다시 맞춘, 꼼꼼히 기록되었던 역사이다. 영화는 이전 <인피니티 워>에서 등장하지도 않았던 호크 아이 가족의 고즈넉한 오후에서 ‘문득’ 시작된다. 곧 그를 제외한 온 가족이 소멸되고 순간 혼란스러워진다. 이 장면은 플래시백으로 볼 수 없으니 굳이 말하자면 새로운 장면이자 과거의 미래형인 셈이다. 이윽고 악당 타노스는 목이 잘린 채 죽어버린다. 3시간짜리 영화인데 벌써 제거의 대상이 사라지다니, 또다시 헷갈리게 된다. 그는 죽었지만 세상은 여전히 암울하고 치유가 필요한 우울증 환자로 가득하다. 다시 영화적 마법이 필요해지는 시점이다.

돌이켜보면 어벤져스의 히어로들은 모두 흠결이 있던 부적응자들이었다. 아이언 맨은 마치 내일이 없는 삶처럼 인생을 탕진하다가 고장난 자신을 고치면서 세상도 수리가 필요하다고 깨닫는다. 오딘의 아들 토르 역시 아스가르드의 왕이 되기엔 부족한 자질을 가졌지만 동생 로키와의 갈등을 봉합하면서 앞으로 자신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자각한다. 캡틴 아메리카 역시 허약한 자신의 신체를 개조하면서 위문공연에 한정된 피에로의 삶에서 나아가 독일의 비밀조직인 하이드라와 직접 맞서게 된다. 헐크는? 두 말할 나위 없다. 스파이더 맨이 자신의 삼촌에게 들었던 ‘큰 힘에는 책임이 필요하다’라는 말은 공동체의 이상향 구축이란 미국적 정의의 실현이라는 목표지점에 다다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MCU를 지탱했던 각각의 히어로들의 역할은 서부를 평정했던 선배 카우보이들의 시대적 정의란 원형(prototype)을 그대로 좇아간다.

앤트맨의 아이디어로 양자영역을 통해 특정 시점의 과거로 회귀하여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자는 절박한 시대적 사명으로 똘똘 뭉친 어벤져스는 인피니트 스톤 6개를 모두 획득할 수 있었지만, 죽기 이전의 타노스의 계략에 의해 엄청난 대전투가 벌어지고 만다. 타노스는 줄곧 ‘자기라는 존재의 필연’에 대하여 역설하지만 이는 2차 대전 당시 ‘역사 발전의 필연’을 부르짖으며 홀로코스트를 획책했던 히틀러의 모습과 묘하게 겹쳐진다. 그래서일까 흥망을 가르는 절대절명의 전투는 외견상으로는 <반지의 제왕> 중 쉴새없이 성벽으로 달려드는 우르크하이와 맞서는 아라곤과 레골라스로 대변되는 헬름협곡 전투 장면을 생각나게 하고, 최근 대단원의 막을 내린 <왕좌의 게임> 시즌 8에서 죽은 자들과의 전쟁에서 하나씩 스러져가는 스타크 가문의 군사들, 그리고 아리아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는 백귀가 떠오른다. 그러나 나에게는 히틀러의 자살 전 며칠을 그려낸 <다운폴>에서 망가져가던 브루노 간츠의 모습이 타노스와 오버랩이 되는 것을 떨칠 수 없다.

감독이 직접 SNS에 스포일러 방지를 부탁했던 또 하나의 영화는 <기생충>이다. 감독 스스로가 장르영화임을 천명하였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하고, 객석이 밝아져도 머리가 뒤죽박죽인 것은 영화적 소양의 부족 때문만은 아닐 것으로 자위해 본다. 영화의 줄거리는 의외로 단순하지만, 잔재미를 추구하는 감독의 디테일 과잉으로 인해 간결하게 축약하기는 힘들다. 대략 냄새와 순진함(혹은 부자), 지하실(혹은 반지하, 혹은 내려감), 비(혹은 물) 정도가 주제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상류층과 하위계급은 서로 체취를 맡을 정도의 물리적인 근거리에 위치하지 못할 것이지만, 이선균의 아들은 송강호 가족들의 체취를 맡으며 그들이 동질한 집단임을 확인한다. 지하실에 몇년간 은신해있던 근세가 밝디밝은 대낮,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로 꽉 찬 야외정원으로 나와 광란의 칼부림을 하다가 쓰러지자 병원으로 아들을 데려가기 위해 주검을 옆으로 들추고 자동차 열쇠를 찾던 이선균의 찡그린 미간에 폭발한 기택의 분노의 칼질 역시 냄새로 치환되는 계급구조에 대한 과민한 반응이었다.

“부자인데다가 착하기까지 해.” 부자여서 악할 필요가 없다는 건지, 착하게 살다 보니 부자가 되었다는 건지는 알 수 없다. 계급투쟁의 선상에서 보자면 부자는 그 이면에 악한 본성이 있어야 하지만 감독의 시선은 마이바흐 승용차를 타는 상식적이고도 무난한 부자를 그려내는데 그친다.

그러나 그들의 인자함은 상대적 약자가 오직 선을 넘지 않을 때 베풀어진다. 그런 점에서 권력에 일방적으로 유린되던 서민의 억울함이 절절하던 전작 <괴물>, 오직 직진하여 우등칸의 일등시민을 무찌르고 권력을 쟁취하려던 하층계급의 폭도를 그린 <설국열차>에 비해서는 많이 유순해졌다.

과외선생이 되기 위해 좁디좁은 길을 쉼없이 올라가던 가짜 대학생 기우의 극세사 다리와 저택 지하실에서의 대소동 이후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하염없이 계단을 통해 집으로 내려가던 기택 일가를 감싸던 음습한 기운은 이들이 사는 반지하 방이 세상과는 반쯤 열린 창문으로만 소통되며 실상은 땅속으로 침잠해버린, 때로는 연기소독으로 세정이 필요한 밑바닥이었음을 상기시킨다. 이 점에서 영화는 <델리카트슨 사람들, 1991>의 기괴함과 닿아있다. 인육을 먹는 게 당연시되어 버린 시대에서 진정한 사랑을 얻고, 굶주림에 지친 지상세계 사람들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지하세계에 사는 지하인간들과 동맹하는 주인공, 모든 악의 근원이었던 푸줏간 주인이 죽자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평화로운 첼로 이중주를 선보이는 두 주인공. <기생충>에서 퍼붓던 억수 같은 비와 <델리카트슨>에서 목욕탕에 가득 채웠던 물이 쏟아지며 먹을 것에 매몰되었던 사람들을 단죄하던 물의 이미지와 극단적인 빛과 어둠의 이미지는 지상과 지하를 연결하는 삼투압을 지닌 매개체이자 그 자체로서 단절막이 된다.

위의 두 영화는 모두 죽음(임박한 죽음)으로 일단락된다. 토니 스타크는 대의를 위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업무를 받아 더 이상 치즈버거를 먹지 못하게 되었고, 캡틴 아메리카는 스스로 불멸의 존재를 박차고 가장 행복했던 과거로 회귀하여 연인과의 못다 이룬 약속을 지킨 후 백발의 노인이 되어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게 된다. 정원의 칼부림으로 죽게 된 기정과 동익, 근세, 그리고 그 이전 지하실에서 죽게 된 근세의 처 문광의 메시지는 녹록치 않은 하층민의 고단한 삶(뛰어야 벼룩이다)을 살짝 보여준 것이라면 지나칠려나? 어쨌거나 이 글이 나올 때쯤이면 누가 죽었는지를 미리 고지하는 스포일러에 대한 방지는 시효가 만료되었을 터이니 안심하고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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