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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편견과 차별
노인 편견과 차별
  • 유형준
  • 승인 2019.06.03 09: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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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 오디세이아 (75)
유 형 준CM병원내분비내과 과장 시인.수필가
유 형 준 CM병원내분비내과 과장 시인.수필가

스물여섯 살의 팻 무어(Patricia Moore)는 코카콜라 병과 쉘의 로고를 디자인 한 뉴욕의 한 산업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었다. 기획 회의에서 그녀는 “관절염 환자가 냉장고 문을 쉽게 열수 있도록 디자인 할 수 없을까요?”라고 간단한 질문을 했다. 그러자 그녀의 고위 상사 중 한 명이 경멸조로 말했다. “패티, 그 사람들을 위한 디자인은 하지 마.” 욱하고 다음과 같은 의문과 함께 화가 치밀었다. ‘그 사람들, 그 사람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거야?’ 그녀는 감정 이입 실험을 해서 여든 살 여성으로서 삶의 현실을 발견하기로 결정했다. 늙고 주름져 보이게 화장을 하고, 시력을 흐리게 하는 안경을 끼고, 몸통에 부목을 대고 붕대로 감싸 등이 굽어보이게 하고, 귀를 막아 잘 들리지 않게 하고, 제대로 맞지 않고 바닥이 고르지 않은 구두를 신어 지팡이를 짚어야만 걸을 수 있게 했다.

그녀는 노인 페르소나로 미국의 백여 도시를 방문하여 노인들이 직면한 일상적인 과제와 대응 방법을 몸으로 부딪쳐 구했다. 슈퍼마켓에서 쇼핑을 시도하고 계단을 오르내리고 백화점을 오가며 버스를 타거나 냉장고 문을 열거나 캔 오프너를 사용했다. 평소에는 사근사근한 점원이 노인으로 변장한 자신을 냉대하고 일부러 잔돈을 얼버무리려하는 돌변을 대했다. 또한 거리에서 깡패에게 후유증이 남을 만큼의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노인이 얼마나 약하고, 소외받은 존재인지를 몸소 겪었다. 노인이라는 것만으로 주위로부터 받는 차가운 대응, 조롱, 편견, 무시, 차별 등을 통감했다. 삼 년간의 노인 체험을 묶어 팻 무어는 『변장:  실화(Disguised: A True Story)』를 발간했다.

연령차별은 원래는 특정 연령에 관계없이 나이의 높낮이를 이유로 행해지는 다양한 편견과 차별의 총칭이다. 영어로는 에이지즘(agism)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노인 차별을 일컫는 용어로 쓰인다. 노년차별이 연령차별의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노년층이 일반적으로 가치가 낮고 사회에 무거운 경제적 부담을 가한다는 인식은 오랫동안 널리 보급되어 왔다. 나이는 부족한 의료 자원(예 : 신장 이식)을 배분하기 위한 당연한 기준으로 사용되었으며, 개인보다 더 큰 사회 이익이라는 편견에 근거하여 정당화되어 왔다. 편견의 정당화는 서서히 사회의 상식으로 굳어지기까지 했다.

노인에 대한 고정 관념과 편견과 차별을 자아내는 수없이 많은 요인들이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자주 간과하는 두 가지를 든다. 하나는 ‘특정 나이엔 그 나이에 걸맞은 역할이 있다’는 전제를 충족시키지 못할 때에 발생한다. 다른 말로 하면 ‘나잇값’을 못하는 경우에 노년차별주의가 기승을 부린다. 또 하나는 노인에 의한 노인 차별이다. ‘노인이니까’, ‘조용히 집에 있어야지’ 등의 말은 거의 대부분 노인의 혀에서 나온다. 노인 스스로 노인 무용(無用)의 ‘상식’을 조성하는 까닭이다.

노년차별을 없애는 일은 어렵다. 그 시대의 ‘상식’과 다투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금이야 노예와 귀족 같은 계급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노예 제도가 존재했던 시대에는 그것이 ‘상식’이었던 셈이다. 당시엔 가장 분별력이 뛰어난 사람조차도 노예 제도를 이상하게 여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노예조차도 노예 제도 자체에 익숙했다.

이러한 시대의 상식과 맞서 노인차별을 없앨 방도는 무엇인가? 예측하기 어려울 만큼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는 느긋함을 전제로 몇몇 방책을 제시할 수 있다. 우선, 노인 기본권 보장을 위한 제도적 환경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노인의 고용촉진을 위한 제도 개선 및 노인의 안전과 사회 참여권의 확대 등이 제안된다. 이보다 더 기본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일은 노인에 대한 인식 개선을 위한 사회적 교육 노력이다. 특히 가치관 형성 시기의 아동과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이 필요하다. 동시에 노인들과의 접촉과 소통이 상대적으로 잦은 노인 복지 서비스 제공자로서의 대표적 직역인 의사를 비롯한 의료인, 사회복지사, 물리치료사, 가정봉사원, 간병 요양인, 자원봉사자 등의 인식 제고 교육이 강화되어야 한다. 아울러, 앞서 일렀듯이 노인 자신의 의식 증진이 우선적으로 다져져야 한다.

이쯤에서 노년차별주의를 요약하여 정리한다. 연령주의를 대표하는 노년차별은 젊은 세대로 하여금 노인들을 자신들과 다른 인간들로 보는 타자화를 증폭 확대시켜 노인들과의 인간적 동일시를 거부하게 한다. 즉, 나이든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타자화(他者化)하고 차별화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노년차별의 개선은 노인 스스로의 변화와 사회 조직의 개전(改悛)이 아우러져야 뚜렷해진다.

다시 패트리샤 무어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그녀는 노인 체험과 통찰력을 바탕으로 관절염이 있는 고령자가 사용하기에 딱 좋은 냉장고 손잡이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의 혁신적인 제품을 설계 할 수 있었다. 두꺼운 고무 손잡이가 있는 감자 껍질 벗기는 기구도 그녀의 발명품이다. 그러한 공로로 그녀는 성별, 나이, 장애, 언어 등으로 인해 제약을 받지 않도록 설계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유니버설 디자인 창시자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디자인 회사를 창립하고 디자인의 ‘공감적 모델’에 관해 글을 쓰면서 노인학 분야의 전문가로서 활동하고 있다. 이십 대의 그녀가 팔십 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주보았던 삼 년간의 시간 여행은 다른 사람들의 삶뿐만 아니라 그녀의 삶도 상식도 바꾸었다.

문득, ‘에이지즘’이란 말을 최초로 사용한 미국의 노인의학자 로버트 버틀러(Robert Butler)의 별세를 전한 <타임>지 부고(訃告)가 떠오른다. “로버트 버틀러는 겨우 향년 8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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