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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적인 노동 시스템 이러다 죽겠다 싶어요”
“기형적인 노동 시스템 이러다 죽겠다 싶어요”
  • 김규성
  • 승인 2019.04.15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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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5시부터 근무 `파김치' 밥 먹고 씻을 시간도 없어
30대 후반에 전문의로 활동 미래 금전적 보상은 `옛말'
김규성 서울대 보건대학원 직업환경의학과 4년차
김규성 서울대 보건대학원 직업환경의학과 4년차

처음 전공의를 시작할 때, 주위 선배들은 “은행과 치과는 미리 다녀와야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은행이야 그렇다 쳐도, 병원에서 근무하는데 치과 진료 십 몇 분 받을 시간이 없을까 예약해놓고 일하다가 잠깐 치료 받고 오면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순진한 생각이었다.

전공의들은 일과시간에 조금도 쉴 틈이 없다. 한숨 돌리기는커녕, 밥을 먹는 시간도 몇 분 이내로 맞추기 위해 눈치 보기도 한다. 전문의 선생님들의 외래가 9시에 시작한다면, 선배 전공의들의 회진 준비는 최소 아침 7시, 낮은 년차의 전공의들은 최소 새벽 5시에는 `회진 준비를 위한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동맥혈 채혈, 비위관 삽입 같은 술기부터, 환자 상태를 확인하고 아침 처방을 내는 업무까지 내용도 다양하다.

새벽 5시부터 일과가 시작된다고 했지만, 그 전에 잠을 편하게 잘 수 있는 것은 또 아니다. 자정이 넘어서까지 최소 한 시간 간격으로 오는 `콜'은 전공의들이 제대로 된 수면을 취할 수 없게 만든다. 특히 콜 내용이 어이없거나 불필요한 내용일 경우에는, 며칠 밤을 설친 탓에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한다.

거의 밤을 세고 새벽 5시에 일과를 시작한 전공의는, 제대로 밥 먹을 시간도 씻을 시간도 없이 하루 종일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다가, 자정 넘어 겨우 눈을 붙일 수 있을까 싶을 때 한 시간 간격으로 콜을 받는, `블랙홀' 같은 생활을 반복한다. 기억을 더듬어 묘사한 전공의의 생활은, 병원마다, 과마다, 또 연차마다 세세한 사정이야 조금씩 다르겠지만, 보통 사람은 상상조차 못할 정도로 열악하다는 것은 공히 틀림없다.

눈치 빠른 분은 벌써 느꼈겠지만, 앞서 묘사한 전공의의 생활에서 제대로 된 `퇴근'은 없다. 전공의들은 `오프'라고 해서 저녁 시간에 당직이 아닌 날을 배정받기도 하지만, 다음 날 새벽에 일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집에 가지 못하고 대개 당직실에서 자는 경우가 많다. 얼마 전 당직 후 사망한 인천 모 병원 전공의 선생님도 병원 당직실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전공의의 `오프'는 비유하자면 꼭 군대 병사의 `외출'과 비슷한 느낌이다. 전공의의 일과시간은 사실상 24시간이고, 일상은 꼭 군생활을 두 번 하는 것처럼 열악하다.

전공의로 산다는 것. 이 질문에 가장 먼저 떠오른 대답은 `아직 얻지 못한 것을 볼모로 많은 것을 포기하는 삶'이다. 전문의가 되면 금전적으로 보상 받을 테니까, 예전 선배들도 전공의 땐 다 그랬으니까, 전공의들은 이런저런 핑계로 기본적인 생활을 포기하도록 강요받는다. 그나마 전문의가 되면 보상받을 것이라는 얘기도 이제는 옛말이 되어버렸다. 대개 전공의 이후에 거치는 펠로우 과정은 `펠노예'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근무조건이 어려워졌고, 기간마저도 늘어나 3, 4년 이상 펠로우로 일하도록 요구받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전공의의 기형적인 노동 시스템은 조금씩 전문의를 포함한 의사 전체로 확대되고 있다.

의대 과정, 전공의, 남자의 경우 군대까지, 모든 과정을 마치고 전문의로 필드에 나오려면 10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대입 재수, 휴학을 하거나 어떤 개인적인 사정으로 공백마저 생기면 사실상 전문의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나이는 30대 후반이나 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다른 직역에서 30대 후반의 전문직들이 누리는 보상에 비해, 의사가 누리는 보상이 과하다고 할 수 있을까?

절대 받는다고 보장받지도 못할 보상이지만, 그런 보상을 얻는다고 해서 젊은 전공의들이 기본권을 포기하도록 강요받을 수 있는 것일까? 최근 한 예능 PD가 연봉을 30억 가까이 받았다는 기사에 `우리에게 웃음을 줬으니 충분하다'라는 댓글을 본 적이 있다. 잠도 못자며 사람을 살려도 멱살을 잡히고 욕을 먹어야 하는 우리의 직업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개인적으로 전공의 마지막 연차가 되고, 길었던 전공의 과정의 끝이 가까워 오면서, 전공의의 열악한 근무환경은 마치 떠올리기 싫은 군대 시절의 기억처럼 되어버렸다.

이제 나이가 들고 가족의 건강과 때론 내 자신의 건강까지 챙겨야 하는 시기가 오면서, 지금처럼 전공의들이 잠 못 자고 일하는 병원에 내 가족을 맡길 수 없다는 불안감이 들기 시작했다. 시스템을 잘 아는 탓에, 피해를 입어도 마냥 해당 주치의 탓을 할 수 없겠다는 생각에 답답한 마음마저 든다. 전공의의 열악한 근무환경 문제는 단순히 전공의들만의 문제도,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만의 문제도 아니다. 아파서 병원을 이용해야 하는 사람들이 모두 관심을 갖고 해결해야 할 문제다. `잠 못 자는 전공의의 환자가 된다는 것'은, 잠 못 자는 전공의로 사는 것만큼이나 너무 무섭고 불안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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