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20:55 (금)
나잇값
나잇값
  • 유형준
  • 승인 2019.04.01 09: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늙음 오디세이아 〈68〉
유 형 준 CM병원 내분비내과 과장시인·수필가
유 형 준 CM병원 내분비내과 과장시인·수필가

값은 물건을 사고팔 때에 치러야하는 돈의 크기다. 동시에 값은 어떤 사물이나 사실이 지니고 있는 중요성이나 가치를 일컫는다. 그 중요성이나 그 가치를 얻으려면 그만한 값을 유형이든 무형이든 지불해야 한다.

미국 컬럼비아대 심리학과 토리 히긴스 교수의 주장대로 사람은 자신과 주변의 것들을 평가하려는 평가동기를 갖고 있다. 모든 것을 비교하고 따져 구체적 금액으로든 또는 추상적 관념으로든 정하려한다. 그래서일까 나이에도 값을 매긴다. 여기서 말하는 값은 `무엇에 합당한 구실이나 노릇'을 가리키므로 나잇값은 `나이에 어울리는 말과 행동'을 이르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나잇값은 어른이 어른답지 못한 언행을 할 때, 노인이 노숙하지 못하게 유치한 말과 몸가짐을 보일 때 그것을 낮잡아 얘기할 때 쓰인다. 비슷한 말로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이 같은 감성과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키덜트[키드와 어덜트의 합성어]라는 말이 있는데, 나잇값은 이 말보다 좀 더 낮추어 대할 때 쓰인다. 키덜트는 개인적 성향인 반면에 나잇값은 주변 영향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넉넉히 들어 있는 까닭이다. 그래서 제 나이에 걸맞은 구실을 못하는 경우에 `나잇값을 못한다', `나잇값 좀 해라'고 타박한다. 

그렇다면 나잇값을 결정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당연히 나잇값을 산정하는 정해진 방법이나 공식은 없다. 다만 동양과 서양의 현자들이 내세운 연령가치 평가론(?)을 빌려 얼추 따져본다. 먼저 공자님의 나이 가격 산정법이다. 마흔에 `흔들리지 말라[불혹(不惑)]하셨으니 무언가에 정신을 빼앗겨 갈피를 못 잡는 경우엔 값을 헐하게 쳐줄 수밖에 없다. 또한 일흔에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고 하셨으니 욕심을 내려놓고 넉넉히 가벼워진 마음을 좇으면 값이 올라간다.

다음은 세계적 발달심리학자인 미국의 에릭 에릭슨의 가격 기준이다. 41세에서 65세엔 스스로 `자신의 삶을 인정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값을 따진다. 이 나이는 자신의 욕구에 더 몰두하여 남에 대한 관대함이 모자란다. 그러므로 이 시기엔 자기 것을 남에게 기꺼이 넘겨줄 수 있을수록 고가의 나잇값이다. 그렇지 않고 자기도취에 허우적거리면 정체 속에 지쳐간다고 에릭슨은 지적한다. 65세 이상에선 `나는 내게 좋았었는가?'를 헤아려 값을 매긴다. 이제까지 살아온 삶을 돌아보며 `그래도 만족했다'고 확신할수록 값이 높아진다.

그러고 보니, 동서고금을 통해 나잇값을 정하는 공통의 변수는 욕심이다. 마흔이든 예순이든 일흔이든 무언가 욕심에 치우치지 않을 때에 에누리 없이 정가를 받을 수 있다. 그 이유는 지나친 욕심으로 인해 내가 받는 어려움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받는 불편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욕심을 내리면 귀가 열리고 눈의 방향이 열린다. 이런 현상을 배려라 할 것이다. 배려는 저절로 생기고 자라며 성숙해지는 본성이 아니다. 늘 자신을 돌아보며 배우고 익혀야 생장하는 적응의 숙련이며 약속의 연습이다. 나이 든다고 누구나 자연스레 노숙해지지 않는 순리를 상당히 닮았다. 나잇값을 매길 가장 중요한 대상은 바로 나다. 스스로에게 물어 스스로 값을 헤아리는 일이다. 스스로에게 욕심의 과잉을 따져 묻는 일. 그렇게 자신에게 물어보는 그 자세와 행위만으로도 나이의 가격을 높아질 것이다.

나잇값 역시 이른바 시세를 탄다. 당시의 세상의 복잡다기한 변수들이 자아내는 형편에 따라 오르고 내린다. 노인의 숫자가 드물고 지금처럼 정보를 구할 통로가 귀했던 시절엔 세상 사는 데에 필요한 해법을 많이 알고 있는 늙음은 비싼 나잇값을 받았다. 그러나 평균수명이 길어지면서 노인 인구가 급증하고, 지식과 정보의 습득 경로가 다양하고, 심지어 일자리를 두고 경쟁 상대가 되어버린 늙음의 값은 계속 떨어지고 있다. 날이 갈수록 그 값이 나이와 반비례 하고 있다. 나이가 들어 상대적으로 사회적 지위가 낮아지고 인정받지 못하는 `나이 많은 사람 차별주의'[ageism]가 갈수록 심해지는 세태를 우려하는 이도 있을 정도다.

나잇값이란 말 속엔 나이는 공짜로 드는 게 아니란 뜻도 들어 있다. 아주 현실적으로, 의식주 비용은 물론이고, 아픈 고비를 넘기려고 지불하는 의료비뿐만 아니라 바뀌는 세대에 적응하기 위한, 바뀌어가는 세대를 이해하기 위해 변화한 사회의 약속 체계에 관심을 갖는 비용을 들여야 한다. 더 이상 긴 설명이 필요 없이 나이 먹는 데도 엄연히 값이 든다. 따라서 나이에 나잇값이 있다는 말은 대개 나이 들면 전보다 가치가 높아진다는 뜻을 품고 있다. 그래서 늙음이 가져다주는 부가가치를 자연스럽게 기대하기 마련인데, 그렇지 못할 때에 느끼는 실망감이 `나잇값도 못해'라는 말로 튀어나오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변치 않는 나이의 기본 값이 있다. 나이 그 자체가 지닌 값이 있다는 믿음이다. 어디서나 어느 때나 누구나 겪고 있는 늙음은 그 자체가 의미 있는 가치를 품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별나게 가격하락을 위해 애쓰지 않는 한 현저한 가격 하락은 발생하지 않는다.

시간이 가고 세월이 쌓이면 나이는 값을 갖게 된다. 하루가 가면 하루치만큼, 달이 가고 해가 바뀌면 그만큼 값도 쌓인다. 세월이 쌓인다고 크로노스의 삶만 휘익 지나가는 건 아니다. 카이로스의 젊음도 왔다 갔고, 지금도 늙고 쇠약해진 크로노스와 함께 카이로스의 늙음도 같이 가고 있다. 순간순간 제 나이의 의미와 가치를 깨우쳐 처신하는 언행심사도 세월과 더불어 쌓여 값을 발휘한다. 그 값은 세월과 시간에 매겨지는 게 아니라 늙은 나에게 붙여지는 가격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