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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불로(心不老)
심불로(心不老)
  • 의사신문
  • 승인 2019.03.2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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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 오디세이아 〈67〉

유 형 준 CM병원 내분비내과 과장
(시인·수필가)

 

“말을 하기도 전에 이미 글을 배워 버린 거야.”
“선배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러니까, 신동이지.”
“여하튼 내 경우는 조금은 유별난 경우였고 그를 집안 어른께서 알아채신 거야.
“물론 최치운 할아버지시요.”
“그래서 생후 8개월 만에 내 이름이 시습으로 결정되었지,”
“생후 8개월에 글을 알아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황천우의 `조선의 이단아 - 김시습과 허균'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듯이, 대화를 나누는 사람은 허균과 김시습이다. 물론 김시습과 허균이 실제로 만나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기록은 없다. 작가의 소설적 상상이다. 김시습이 태어난 지 여덟 달 만에 글을 읽는 것을 보고 이웃에 살던 집현전 학사 최치운이 논어의 `학이'에 나오는 단어를 따다가 `배우면 곧 익힌다'는 뜻으로 시습(時習)이라고 지어 준 일을 김시습이 허균에게 들려주고 있는 장면이다. 최치운이 떠올렸던 공자 말씀은 잘 알려진 바로 다음의 글이다. `배우고 때때로 배운 것을 곧 익힌다면 즐겁지 아니한가?/먼 곳에서 찾아오는 벗이 있다면 즐겁지 아니한가?/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해 하지 않는다면 군자가 아니겠는가?[學而時習之(학이시습지)不亦說乎(불역열호)/有朋自遠方來(유붕자원방래)不亦樂乎(불역락호)/人不知而不溫(인부지이불온)不亦君子乎(불역군자호)]'

다섯 살에 김시습은 같은 마을에 사는 이계전의 문하에서 글과 학문을 배웠다. 이계전은 당시 집현전 학자로서 그의 할아버지가 고려의 이색이고, 아버지는 사육신의 한 사람인 이개다. 신동에 관한 소문은 자연스레 궁궐에까지 퍼졌다. 궐내 소문을 들은 좌의정 허조도 궁금했다. 그는 살며시 신동을 찾아와 넌지시 테스트를 한다. “네가 글을 아주 잘 짓는다던데 이 늙은이를 위해 노(老)자를 넣어 시 한 구절만 지어 줄 수 있겠느냐?” 신동은 전연 머뭇거림 없었다. `노목개화심불로(老木開花心不老)'[늙은 나무에 꽃이 피니 그 마음 늙지 않았네].

다섯 살배기가 늙음의 속내를 알리는 없었을 것이다. 신출한 재능으로 글자나 그림으로 기호화 되었거나 이미지로만 그려놓은 추상적 늙음을 깨쳤을 진 모르겠다. 그러나 노인이 불쑥 던진 늙음을 가리키는 `노(老)'라는 글자의 길이와 너비와 두께와 무게를 어렴풋이라도 알았을까. 아무튼 신동은 바로 눈앞에 서 있는 노인을 얼핏 쳐다보며, 그 동안 집안팎에서 만났던 노인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세월에 눌려 쇠잔한 목소리로 옛날이야기만 되풀이 하는 노인, 오늘도 동녘 해 뜰 시간이면 어김없이 의관을 정제하며 하루를 살피는 노인. 나날이 스러져 가는 노목 중에 반짝 꽃을 피우는 노목은 그렇지 않은 노목과 무엇이 다른가. 마을 어귀를 지날 때마다 신동은 묵묵히 서있는 노목들과 자기가 만나고 보았던 노인들을 자주 빗대어 보았을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둘 사이에 차이를 발견할 수 없었으니 `늙지 않았다[不老]'라고 글을 맺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때 문득 언젠가 글공부방에서 배웠던 `인로심불로(人老心不老)'란 글귀가 떠올랐을 것이다. 이렇게 비상한 기억력 덕택일 거라고 추측한다해도 마음 심(心)을 앞에 붙여 `마음이 늙지 않았다[心不老]'라 한 솜씨는 마냥 놀랍기만 하다.

어느 날 오래 되고 늙은 노목에 꽃 한두 송이 피었다 하여, 그것도 힘겹고 어색하게 돋았다 하여 그 나무가 화창한 화목(花木)이 될 순 없다. 쪼그라든 가슴에 꽃 브로우치를 다는 마음의 드러냄일 뿐이다. 늙음은 늙음이다. 늙음은 나의 의지나 각오와 관계없이 쉼 없이 그리고 열심히 늙어 가고 있다. 젊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면 기도하는 시간만큼 늙어간다. 늙음은 언제 어디서든지 늙음답게 당당히 늙어간다. 그런데 다섯 살짜리 아이가 늙음이 드러내는 이러한 인문의 이치를 어떻게 알고 `불로(不老)' 앞에 마음 심(心)을 앞세울 수 있었을까? 사뭇 놀랜 가슴을 달래며 마음 심(心)자와 관련된 개인적 기억을 떠올려 본다.

`마음의 귀'를 뜻하는 `심이(心耳)'라는 두 글자를 진료실안 가장 잘 보이는 곳곳에 써 붙여 놓았던 적이 있다. 천직이라 믿는 의업에 가장 필요한 덕목은 솟구치는 열정이라고 믿던 젊은 시절이었다. 의사가 철저히 공부하고 판단하여 베푸는 진료에 다른 이가 말하는 귀설은 소리는 들리지도 않고 듣지도 않던 때다. `귀에 달린 귀'는 슬그머니 막히기 시작하고 진료실엔 소소한 소동이 잦아지더니 결국 열정의 솟구침이 최상의 덕목이 아님을 깨닫게 하는 드잡이가 벌어졌다. 깊은 충격은 다음날 진료실 여기저기에 두 글자를 붙여놓았다. `마음의 귀'는 얼굴 양쪽에 달린 해부학적 귀를 조금씩 대신하기 시작했다. 대신해 준다는 건 양쪽 귀로 들린 소리를 마음 속 깊이 자리한 마음의 귀가 재해석하여 들려준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격렬한 불만'을 `깊은 관심'이라고 풀어서 알려 주는 방식으로 열정의 솟구침을 도닥여 달래주며 진정시키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웬만한 명사나 동사 앞에 마음 심(心)자를 붙이면 원래 그 단어가 갖고 있던 강도보다 온유해지면서 억지도 억울함도 뚜렷이 수그러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치 늙는 게 억울해 `불로(不老)'라고 우기던 억지가 `심불로(心不老)'라고 마음 하나 앞세우니까 사그라지듯이. 늙은 나무가 꽃을 피워서[老木開花] 마음이 늙지 않은 게[心不老] 아니다. 마음이 늙지 않아서[心不老] 늙은 나무에 꽃이 피는[老木開花] 것이다.

지난 일을 기억하고 나니 더 궁금해진다. 늙음도 마음 먹기 달렸다는 걸 다섯 살 시습은 어디까지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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