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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세 번 바뀌면…<31>
계절이 세 번 바뀌면…<31>
  • 의사신문
  • 승인 2010.08.11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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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난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소리 없이 주변에 퍼졌나봅니다. 장마가 끝나갈 무렵 좋은 난이 하나 있으니 가져가 키우라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누군가에게 기억되어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고맙고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냉큼 달려가 받았습니다.

화분과 화분 받침은 일습으로 된 청색 자기였고 난은 무늬가 화려합니다. 난 잎은 좁은 편이었고 늘어지지 않고 힘 있게 서 있습니다. 보내 주신 분이 화랑을 운영하고 있는데 아마도 작품 전시회에 축하의 뜻으로 배달되어 온 난인 듯합니다.

돌아와 난을 자세히 살펴보니 걱정이 앞섭니다. 우선 어떤 품종의 난인지 알 수 없습니다. 초여름이나 가을에 꽃을 피우는 난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정확히 모르니 최선의 환경을 만들어 줄 수 없습니다. 아무래도 인터넷의 도움을 받아야 할 듯합니다.

두 촉이 새로 올라오고 있는데 이 새 촉을 감싸고 있는 치마 잎이 벌써 마르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큼직한 검은 점도 하나 자리 잡고 있습니다. 치마잎이 마르면 더 이상 자라지 않습니다. 저 검은 점은 더 큰 걱정거리입니다. 암튼 좋은 난임에도 대접은 잘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화분의 난석도 마땅치 않습니다. 충분히 씻지 않고 그대로 심은 탓에 돌가루가 그대로 난에 묻어 있습니다. 그나마 부족하게 채워서 난을 충분히 덮고 있지도 못합니다. 화분 옆의 통풍 구멍을 통해 보니 아래쪽에 큰 돌이 보이지 않습니다. 새 촉의 검은 반점은 아무래도 화분 속의 습도가 과해 생긴 것이 틀림없습니다.

화분을 쏟았습니다. 예상대로 먼지가 풀썩 올라왔고 굵은 돌은 없이 팥알만한 난석을 채워져 있었습니다. 화분 속은 돌가루가 얼룩얼룩 묻어 있고 난의 뿌리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물로 화분과 난을 씻어내니 흙탕물이 흐릅니다.

난 뿌리는 더러 꺾이고 더러는 썩은 부분도 있습니다. 물을 틀어 놓고 씻어가며 상한 뿌리를 정리했습니다. 쏟아낸 난석은 흙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씻어냈습니다. 이렇게 정리하고 씻은 난과 난석을 각각 신문지 위에 널었습니다. 하루 쯤 말렸다가 심으려 합니다.

다음 날 화분 삼분의 일 정도까지 엄지손가락 한마디 크기의 난석을 넣고 그 위에 난을 올렸습니다. 그 위에 그 절반쯤 되는 크기의 난석을 골라 채웠습니다. 마지막으로 팥알만한 난석으로 난을 덮고 화분을 툭툭 쳐서 난석들이 충분히 자리를 잡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물을 충분히 주고 나니 마음이 개운합니다.

약간의 수고를 했지만 이정도로 해서 보내주신 분의 성의에 보답을 했습니다. 여름이 지나기까지는 물주기를 조금 더디게 하려 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쯤이면 견디어 낼 것입니다. 난의 특성을 잘 모를 때는 조금 건조하게 기르는 것이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꽃을 보려면 계절을 세 번 보내야 할 것입니다. 내년 봄이 끝날 무렵까지 보고 기꺼워하다가 꽃이 올라오면 그분께 잠시 다시 맡기고 싶습니다. 이렇게 난으로 인해 기억되었으니 난을 보며 그분의 마음을 기억하려 합니다. 

 오근식 <건국대병원 홍보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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