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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문학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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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사신문
  • 승인 2018.10.07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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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기의 마로니에 단상 〈95〉

정 준 기
서울대병원 핵의학과 명예교수

 

사람을 뜻하는 한자어인 인간(人間)은 원래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의미였다. 사회적 관계가 우리 존재의 핵심 요소인 것이다. 가정, 직장, 사회 같은 모든 조직에서 구성원들의 감성적 화합이 행복하게 사는 데에 꼭 필요하다. 어떤 이유로 바람직한 관계가 설정되지 않으면 당사자의 삶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나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따라서 사람은 자기 주변의 인적 관계에 끊임없는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병원에 근무하는 의료인이나 직원들은 어떤 면에서는 다른 직장인과는 사뭇 다른 환경에서 일하고 있다. 환자가 고객인 일종의 서비스업이지만 대상이 세상 무엇보다도 소중한 우리 몸과 마음의 건강인 것이다. 일반 고객과는 달리 환자는 병원 측의 높은 관심과 절대적인 보살핌을 바라고 있다. 여기에 의사가 이 조직의 리더라는 특성이 있다. 연령이나 경력에 관계없이 전문가인 의사의 지시를 주변 의료인이나 직원들이 따라야 원활한 진료가 이루어진다.

여러분이 짐작하고 경험하듯이 병원은 직장으로서 썩 바람직하지는 않다. 질병으로 고통받아 예민하고 우울한 환자와 보호자를 상대하니 잘못하면 책 잡히기 일쑤이다. 예를 들면, 환자 질병의 진행을 의료인의 과실로 연결시킨다. 치료는 뒷전이고 쓸데없는 검사만 계속한다고 생각한다.  아프고 괴로운 상태이어서 진료 이외의 여러 과정이 다 짜증스럽다. 많은 환자를 처리하기 위해 행정 시스템은 따라만 하기에도 너무 복잡하다. 이러한 이유로 다혈질인 고객은 마지막 수납쯤 가서는 불만이 폭발해 엉뚱한 직원들만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질병을 고치는 일은 당연히 그 분야를 공부한 전문의가 앞장서야 한다. 간호사, 약사, 의료기사와 직원은 팀이 되어 일해야 한다. 그러나 일부 의사들은 이런 역할을 못하고 있다. 자존심 세고, 까다롭고, 자기 위주이어서 같이 일하기 힘든 경우도 있다. 어떤 의사는 업무상의 질서를 사람 사이의 순서로 착각해 스트레스를 더 주기도 한다.

병원에서도 이런 다양한 구성원 간의 협력과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여러 취미 동아리 활동을 장려하고 있다. 올해 초, 우리 병원 인터넷에 열심히 수필을 게재하고 있는 건축과 팀장님과 간호부 과장님이 내 방을 찾아 왔다. 원내에 문학 모임을 만들자는 이들의 열정에 감화되어 문학회를 만들게 되었다.

원내 인터넷에 공지하고 알음알음으로 25명 정도의 회원이 모여 3월에 정식으로 서울대학교병원 문학회가 출범하였다. 나는 정년이 얼마 안 남아 극구 사양했으나 결국 첫 1년 동안만 회장을 맡고, 산부인과 교수님이 차기 회장이 되었다. 간호사, 의료기사, 행정직원, 비상기획실 직원 등 여러 직종에 걸쳐 다양한 회원이 모여들어 원내 화목한 생활을 추구한다는 동아리의 취지에 부합되었다.

이들 중에는 이미 시집이나 수필집을 출판한 사람도 있으나 대부분은 창작 경험이 없는 문학 애호가들 이었다. 아니 다른 예술과 인문학에도 관심이 많은 `문화 애호가'가 더 적절한 표현이겠다. 매달 한번씩 가지는 특강도 수필과 시 작성에 대한 내용도 있었지만 이외에도 역사와 동양철학, 미술, 음악 같은 문화 전반에 걸친 강의를 열고 있다.

호모 사피엔스인 인간의 특성 중 하나가 문화활동이다. 다른 동물 보다 지적으로 다소 우세했던 우리 선조들이 협력해 곡식을 경작하고, 짐승을 수렵하면서 충분한 식량을 생산하게 되었다. 여유가 생긴 시간에 노래, 춤, 그림 등을 만들어 즐기면서 지능도 더 높아졌다. 글자의 발명은 이런 문화활동을 가속하고 또, 발전의 주축이 되었다. 따라서 문화는 인류의 특징적 속성이다.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있는 재소자가 제일 좋아하는 강의 주제가 인문학이고, 집이 없어 바깥에서 자는 노숙자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문화활동 이라고 한다. 다소 뜻밖이지만 여러분도 곧 이해가 될 것이다.

우리 병원에는 인문학, 예술 등에 전문가 못지 않게 조예가 깊은 교수들이 여럿 있다. 이런 비전문가(?)는 우리와 같은 바탕에서 시작하여 공부하고 익혀왔기에 그 분야 전공자 보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우선적으로 문학회에서 강의를 부탁해 자연스럽게 의사 집단과 다른 직종 간에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는 작은 계기가 되고 있다.

나는 첫 연자로 `연건 캠퍼스의 역사문화유적'을 강의하였다. 종로구 연건동 캠퍼스의 과거 역사와 유적,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대한의원이 세워진 1908년부터 지금까지 역사를 살펴 보았다. 강의 후 병원 시계탑 건물(대한의원)에 있는 의학박물관과 복원한 옛 시계도 관람하였다. 동양국가에서는 시간을 측정하는 것이 국왕의 의무이자 권리였다. 고종황제는 이런 목적으로 사용하던 해시계, 물시계를 없애고 경복궁에 서양식 시계탑을 세웠다. 3번째 시계탑을 대한의원에 만들어 서양의학을 적극 수용하겠다는 황제의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120년 전 영국에서 제작한 기계식 탑시계는 천 년은 작동할 수 있게 견고하게 만들었으나 큰 고장이 나서 1980년대에 전자식 시계로 바꾸었다. 옛 시계는 그 동안 탑 꼭대기 먼지 구덩이에 방치되어 있었다. 내가 의학역사문화원장을 하던 2013년에 기금을 모우고 우리나라 시계 명장을 찾아 고치게 되었다.

다음은 3층에 복원 전시한 옛 탑시계를 보고 문학회 회원이 즉석에서 떠올려 만든 시이다. 놀랍게도, 이 것이 그 분의 첫 문학 작품이란다! 진정, 우리 회원 간의 지적 교류와 감성적 화합으로 문학 역량이 높아진 시너지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이 자리를 빌어 모든 병원 동아리가 더욱 활성화 되어, 구성원들이 일할 맛이 나는 직장이 되고, 결국에는 환자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순리가 이루어 지기를 기원한다.

〈시계탑의 비밀〉

먼지의 무게만큼
긴 세월의 시름을 안고
앓고 있던 잊혀진 시계

그러나
역사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함을 아는 이가 있어
우리 장인의 손길을 빌어

그 옛날
다시 볼 수 없기에
천 년이 가도 튼튼하기를 기도하며
만들어
바다건너 보낸
영국 장인의 손길과
만나게 하다.

수백 년 느티나무 같은 위용에
생명을 갖추니

작은 모(母)시계가 큰 자(子)시계들을
향해 조용히 속삭인다.
자 이제부터
똑딱 똑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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