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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눈보라로 결국 4800m에서 하산 만감 교차
끝없는 눈보라로 결국 4800m에서 하산 만감 교차
  • 의사신문
  • 승인 2018.08.27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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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의사산악회, 해발 5035m 중국 쓰꾸냥산 따꾸냥봉 - 산소가 부족해!

조 해 석
대한의사산악회 회장


“해발 4300m, 중국 동티벳 쓰꾸냥산 따꾸냥봉 아래 베이스 캠프. 밖에는 텐트가 날아갈 듯 요란한 소리를 내며 눈보라가 치고 있었다. 내 심장 박동수는 이미 120번을 훨씬 넘어 이제는 140번을 넘나들고 있었다. 귀에서는 쿵쿵! 쉭쉭! 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산소가 부족했다. 지금이라도 좀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할까? 이 한밤중에 눈보라속에서 길을 잃고 헤메지나 않을까? 여기서 이대로 있다가 큰일 나는건 아닐까? 두려움이 밀려왔다. 최대한 숨을 깊이 들이쉬고 천천히 내쉬고… 아! 산소가 필요하다.”

올라갔다 내려올 산을 왜 가냐고 물으신다면 “그냥 좋아서 갑니다.” 하고 답을 하곤 한다. 서울시의사산악회는(이하 서의산) 그냥 산이 좋아서 만난 사람들의 모임이다. 산에 다니다 보니 좀 더 높은 곳으로, 남들이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로 가고 싶은 로망을 꿈꾸게 되었다. 국내 산행만으로는 뭔가 부족했고 자연스럽게 매년 해외 원정산행을 정기적으로 하게 되었다. 올해는 중국 동티벳에 위치한 해발 5035m 쓰꾸냥산 따꾸냥봉이다. 수년 전부터 계획은 했으나 쓰촨 대지진, 사드배치에 따른 한중관계 악화 등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여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2018년 새로이 취임하신 노민관 회장님, 유승훈 등반대장님의 5000m급 고산 등정에 대한 열정과 도전적 의지로 산행을 결행하게 되었다. 등반기간은 우기를 피하여 2018.6.9. ∼ 14. 5박6일간 이었고 10명이 참가했다. 이전의 해외산행과는 달리 숙박시설이 없어 등반 기간중 해발 3800m, 4300m 노지에서 야영을 해야 했다.

■첫째날(서울 - 성도)
모두들 한짐 메고 한짐 들고 인천 공항에 모였다. 고단한 여정이 되겠지만 표정들이 밝고 좋았다. 시간내고 돈이 들더라도 여행은 언제나 즐겁다. 고단한 삶에 소진된 우리들의 마음을 재충전해주는 것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 우리들의 설레는 마음과 달리 이륙이 지연되어 기내에서 이유도 모른채 1시간 이상 대기했다. 어렵게 서비스 받은 맥주는 따뜻했다. 중국인들은 맥주도 따뜻하게 마시나 보다. 쓰꾸냥산에 가기가 왜 이렇게 힘들까? 3시간20분 비행 후 중국 성도(중국어: 成都, 병음: Ch<&25061>ngd<&25161>))에 도착했다. 현재 사천성의 청사 소재지이고 삼국시대에는 촉(蜀)나라 수도였다. 주위 산이 높고 안개가 항상 짙어 맑은날이 드물기 때문에 모처럼 뜬 해를 보면 개들이 이를 이상히 여겨 짖어대었다고 한다. 식견이 좁은 사람이 현인(賢人)의 언행을 비난하고 의심하는 행동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촉견폐일(蜀犬吠日)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했다. 여행 첫날은 들뜨기 마련이다. 늦은 밤이었지만 그냥 자기에는 섭섭했다. 취기가 오를 때 까지 진하게 한잔하고 푹 잤다.

■둘째날(성도 - 도강언 - 영수 - 와룡 - 일륭)
아침 8시 호텔에서 출발하여 도강언을 거쳐 영수에 도착했다. 도강언(중국어: 都江堰, 병음: D<&25161>ji<&25156>ngy<&25085>n)은 기원전 256년에 만들어진 고대 건축으로 수리 관개 시스템이다. 진나라 때 건축되었다고 하는데 놀랍게도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성과 과학적 기술을 인정받아 2000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영수는 깊은 협곡의 초입이었다. 모든 차량은 이곳에 정차해서 중국공안에 운행신고를 했고 20분 정도 휴식시간을 가졌다. 이곳에서 별 생각없이 먹었던 만두맛이 일품이었다. 그저 평범한 만두였는데 서로 눈치보고 먹을 정도로 맛있었다. 구절양장의 도로를 따라 서서히 고도를 올리자 설산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푸른 하늘에 봉우리를 맞대고 끝없이 펼쳐진 설산을 보면서 아! 드디어 그 옛날 토번 왕국의 땅으로 들어가는구나 하는 감회에 잠시 젖었다.

티벳은 7세기경 당나라와 대등한 세력을 이루며 토번(吐蕃) 왕국으로 화려하게 역사에 등장했다. 이후로는 분열과 쇠퇴의 길을 걷다가 몽고와 청나라의 지배를 받게된다. 1912년 청나라 멸망 후 1951년 중국 공산당 정부에 점령당했다. 14대 달라이 라마는 인도 다람살라에 망명 정부를 수립해서 현재까지 독립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2005년 티벳과 북경이 연결되는 철도가 완공되어 한족의 유입이 늘고 경제적 지배력이 강화되면서 티벳의 고유한 전통과 문화가 점차 사라져 가고 있는 실정이다.

깊은 협곡을 돌고 수많은 터널을 지나 일륭에 도착했다. 설산에서 흘러내리는 커다란 내(川)를 따라 산비탈에 형성된 시골 마을 이었다. 티벳 전통가옥과 전통의상을 차려입은 현지인의 모습을 기대했지만 이곳도 벌써 개발붐이 일어 여기저기 신축건물 공사 중이었다. 해발 3200m 고산지대인지라 반팔소매차림으로는 조금 쌀랑한 날씨였다. 산장시설은 2인1실 침대방이었고 전기담요가 깔려있어 따뜻한 밤을 보낼수 있었다. 현지 식사는 한국인들 입맛에 맞춰 있어서 티벳 특유의 향신료 때문에 고생할 일은 없었다. 기억나는 음식은 돼지고기 훈제 요리였는데 적당한 기름기와 쫄깃한 맛에 술한잔 곁들이면 최고였다.

짐 정리 후 가벼운 복장으로 고소적응 트레킹을 했다. 라마사 3200m - 사극림3300m - 쿠수탄 3470m-원점회귀 코스로 7km, 3시간 정도 소요됐다. 라마사 입구에는 타르쵸가 바람에 `파르르 파르르' 소리를 내고 있었다. 타르초란 불교 경문이 써진 오색깃발을 만국기처럼 걸어둔 것이다. 파랑=하늘, 노랑=땅, 빨강=불, 흰색=구름 초록=대양을 각각 의미한다. 타르초의 경전은 바람이 읽어준다. 못배우고 가난한 이들도 이 소리만 들으면 경전 읽는것과 똑같다고 한다. 바로 눈앞에 다가선 설산과 호수, 힘차게 흘러 내리던 계곡물 소리, 햇볕에 그을린 새카만 얼굴의 마부와 기묘한 냄새를 풍기고 방울소리와 함께 터덜터덜 걸어가는 말들의 무리. 그렇게 티벳에서의 하루가 지나갔다.

■셋째날(일륭 - 라마불탑 - 노우원자 3860m)
새벽부터 창가를 때리던 빗줄기는 날이 밝아도 여전히 계속되었다. 출발을 1시간 정도 늦추고 비가 잦아들기를 고대 했으나 빗줄기는 더욱 거세졌다. 더 이상 미룰수 없었다. 피할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다. 앞으로 펼쳐질 고산 등반에 대한 기대감과 날씨에 대한 걱정이 반반 섞인채 산행을 시작했다. 다행히 바람은 잔잔했다. 주능선에 도착하자 반대편 산허리를 따라 어제 버스를 타고 지나왔던 길이 한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산허리 7부 능선을 타고 위태롭게 이어져 있고 그 아래로는 천길 낭떠러지다.

참으로 거칠고 험한 곳에 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을 타고 트레킹을 즐기는 이들이 많이 있었다. 평지가 아닌 산에서 말을 타는 모습이 안전해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탑승자가 말에서 떨어질 때 등자에서 발이 빠지지 않아 말에게 끌려 다니면서 큰 사고로 이어진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고도가 조금씩 높아짐에 따라 머리가 조금 띵하고 몸이 무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평지에서 보다 빨리 허기가 졌다. 지치고 힘들어서 입맛이 떨어지기 전에 먹어야한다. 먹지 못하면 갈 수 없다. 모두들 각자 바위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서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과자봉지가 빵빵하다. 빗물 콧물 섞인 주먹밥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신기섭 선생님이 조금 늦게 올라오셨다. 노민관 회장님이 바로 옆에서 같이 오고 계셨는데 상황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어제부터 시작된 설사가 회복되지 않으신 모양이었다. 걱정이었다. 야영지까지 앞으로 4시간 이상 비바람을 맞으면서 산행을 해야했다. 더 이상 진행해서 상황이 악화되면 홀로 하산하기는 어렵다.

일행 중 누군가는 산행을 포기하고 반드시 동반 하산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말을 불러서 산행을 계속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날씨 관계상 안전이 우려되어 안하기로 결정했다. 산행을 계속 할것인지 이 지점에서 하산을 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산행을 총 지휘하는 등반대장이 직권으로 결정내리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조용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저는 여기서 내려 가야겠습니다.” 홀로 하산 하셨다. 앞으로의 여정에 행여 누가될까하는 하는 마음에 내리신 힘든 결정 이었을 것이다. 아무도 동행해 주지 않는 하산길을, 얼마나 허탈하고 섭섭한 심정으로 발길을 돌리셨을까? 함께 못해서 후회스럽고 미안한 마음 뿐이다. 라마불탑(佛塔, Stupa)을 지나자 고산초원지대가 펼쳐졌다. 저 멀리 곳곳에 야크무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소 비슷하게 생겼는데 털이 훨씬 길고 체구는 조금 작았다. 여름철 털갈이 중인지 초라해 보였다. 조금만 가까이 가도 어느틈엔가 저만큼 멀리 도망가 버렸다. 사람에게 길들여진 동물치고는 꽤나 예민했다. 비는 잠시 가늘어 졌다가 이내 굵어지기를 반복했다. 비에 젖은 손가락이 시리고 손톱이 들떠서 아프기 시작했다. 반창고를 손톱에 감싸서 붙이니 훨씬 편했다. 말들과 뒤섞여 다니는 길은 진창길이 된지 오래였다. 말똥, 말오줌 빗물이 섞여서 기묘한 냄새가 풍겨났다. 이 길을 요리조리 피해서 길가로 걷다가 살짝 숲길로 우회하기를 반복했다. 장족들이 운영하는 산장에 도착했다. 중국인들 특유의 시끌벅적함과 담배연기가 자욱하게 뒤엉켜있었다. 휴식을 취하기에는 피곤한 곳이었다. 이내 발길을 첫 야영지인 노우원자로 돌렸다.
구름에 감긴 설산 사이로 소리없이 조용히 흐르는 강물, 노란색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넓은 초원에 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한가운데 3동의 흰색, 4동의 까만색 텐트가 가지런히 쳐져있었다. 과도영 갈림길에서 내려다 본 노우원자의 풍경은 그렇게 환상적으로 보였다. 시원하게 흐르는 저 강물 속에 비와 땀으로 범벅된 이 몸을 누이리라. 도착하자마자 이내 환상은 깨지고 기막힌 현실이 다가왔다. 강물은 손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노란꽃 사이로 프라이팬 같이 생긴 커다란 야크똥, 밤알 같은 말똥. 그야말로 온천지가 똥이었다. 눈에 거슬리는 것만 대충 치웠다. 그나마 야크똥은 냄새가 덜 났다. 다이닝 텐트가 따로 설치되 있어 테이블에서 편하게 식사할 수 있었다. 노민관 회장님이 아끼던 소주를 꺼내 컨디션 좋은 분들은 기분좋게 나눠 마셨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별빛과 은하수를 볼 수 있을까 하고 기대했었다. 티벳의 하늘은 그걸 허락치 않았다. 대신 푸르른 어둠과 구름에 싸여있는 엄숙하고 고독한 분위기의 설산을 보는데 만족해야 했다. 깊은 잠을 잘수 없었다. 잠시 잠이 오는 듯하면 이내 깨어나고, 시계를 들여다 보면 한두 시간씩 시간은 흘러갔다. 잠깐씩 졸기는 했었나 보다.

■넷째날(노우원자 3860m - 과도영 4200m)
간밤에 비는 완전히 그치고 눈부신 햇살이 온 주위를 반짝반짝 비추고 있었다. 은은한 새 소리, 강물 저편으로 띠 같은 구름이 서서히 움직여 산허리를 휘감고 있었다. 상쾌한 아침이었다. 몇몇 분들은 간밤에 고생을 하신 듯 얼굴이 부시시해 보였다. 진작부터 마부 한사람이 산에다 대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지속적으로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티벳인들의 전통적인 종교의식을 행하고 있는 듯 사뭇 진지한 분위기였다. 나중에 알고보니 간밤에 풀어놓은 말들을 부르는 소리였다.

제법 그럴듯해 보였는데 고작 말 부르는 소리였다니…. 결국 말들이 제 시간에 돌아오지 않자 마부들이 올라가서 몰아가지고 내려왔다. 어제와는 달리 경사가 가팔라졌다. 어느덧 내 머리 위에 있던 설산들과 내 눈높이가 같아졌다. 마치 한라산 백록담을 옮겨다 놓은듯한 익숙한 모습의 산의 모습도 보였다. 편평한 초원지대에는 어김없이 돌로 단단히 지어진 야무진 집들이 있었다. 티벳인들의 목장이자 숙소였다. 머지않아 관광객들을 위한 숙박시설로 슬픈 변신을 할 것이다. 실제로 베이스 캠프 아래 위치한 집들은 벌써 중국인 트레커들을 위한 산장으로 개조되어 있었다.

해발 4000m 넘어가자 해가 구름속으로 숨어버리고 기온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람에 입술이 타고 움직임도 조금씩 굼떠지고 머리가 묵직해졌다. 무기력해지고 자꾸 하품이 나왔다. 보폭을 작게 유지하고 중간중간 멈춰서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깊은 숨을 들이쉬고 입술을 오므린채 최대한 천천히 내쉬었다. 그 멋진 설산의 풍경도 그이후로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베이스 캠프에서의 달콤한 휴식을 꿈꾸며 부지런히 걸었다. 베이스 캠프! 뭔가 있어 보이는 폼나는 이름 아닌가? 기대를 안고 도착한 그곳은 그저 해발 4300m 황량한 곳에 텐트만 덜렁 쳐져 있는 곳이었다. 고산증은 순간적으로 찾아왔다. 텐트 안으로 들어가려고 머리를 숙이는 순간부터 이후로 1시간 가량 꼼짝할 수 없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가슴이 뛰고 두통이 찾아왔다. 감정적으로도 격앙돼 있었다. 필자의 몸상태를 걱정해 주는 격려의 목소리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여 심려를 끼쳐 드렸다. 지금 이순간에도 그저 부끄럽고 죄송스런 마음뿐이다. 어떻해서든 저산소증을 빨리 벗어나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 하지만 가만히 누워서 내 몸과 마음이 이 상황에 적응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별다른 방법은 없었다. 깜빡 졸은 듯했다. 시간은 새벽 1시가 넘었다. 정상 등정을 위해서 일어나야했다. 다행히도 나의 고산증은 사라져버렸다. 여전히 눈보라는 치고 있었다.

■다섯째날(베이스캠프 - 정상)
새벽 2시 모두들 다이닝 텐트에 모였다. 악화된 기상 여건 때문에 정상등정이 가능한지, 안전에 큰 위험 요소는 없는지, 모두들 걱정스런 얼굴이었다. 현지 가이드에게 조언을 구했지만 고객들이 원하면 올라가겠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따꾸냥봉 정상에 올라본 경험은 있었지만 전문 등산가이드가 아니었다. 전적으로 신뢰하고 우리들의 안전을 맡길 수는 없었다. 대부분 정상등반에 대해서 회의적인 분위기였는데 노민관, 박병권 두 분이 정상 도전에 나서기로 결심하셨다. 눈보라 치는 날씨에, 생전 처음 와본 중국의 오지에서, 그것도 4000m 미터가 넘는 고산에서, 만일 불의의 사고가 났을 때 구조대의 손길이 전혀 미칠 수 없는 높은산에서, 아마츄어 산악인들이 정상 공격 결정을 내리기는 쉽지 않았다. 필자는 고민에 빠졌다. 소심한 사람이라 선뜻 용기가 나질 않았다. 수년 전부터 이곳에 오자고 줄기차게 의견을 냈으니 그말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도 없었다. 지금 가지않고 남아서 여러갈래로 후회하느니 일단 갔다와서 “괜한 고생만 했네”하고 한갈래만 후회하는 걸로 결정했다.

맨앞에 티벳 장족출신 가이드, 노민관, 박병권, 필자, 현지 가이드 순이었다. 습기를 짠뜩 머금은 눈은 신발 밑창에 들러붙어 걸음을 더디게 했고 어둠을 밝히기에는 헤드라이트 성능이 약해서 시야 확보가 좋지 않았다. 길은 눈에 파묻혀 분간하기 어려웠다. 중간 중간 황금색 천이 감긴 조그만 돌탑만이 유일한 이정표였다. 티벳 장족 출신 가이드는 나이는 가늠할 수 없었지만 키가 크고 군살 하나 없는 건장한 사람이었다. 고무장화만 신고도 성큼성큼 잘도 걸었다.

시작부터 끝날 때 까지 우리 일행의 움직임을 시야에서 떼어 놓지 않았다. 믿음직한 사람이었다. 말이 통했더라면 좀 더 멋진 등반이 되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날이 밝아지면 두려움도 좀 사라지련만 눈은 그칠줄을 몰랐고 어둠은 그림자가 길었다. 현지 가이드가 이 상태로는 정상 등정이 어렵겠다고 자꾸 말을 걸어 왔다. 얼마나 힘들게 용기를 내서 시작한 산행인데, 중도에 쉽게 포기할수는 없었다. 끝까지 정상까지 올라 가야지 하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한편으로는 눈보라속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될것같은 불안감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4800m 안부를 바로 눈앞에 두고 하산을 결정했다. 정상에 오르지 못한 아쉬움 보다는 그래도 기를 쓰고 여기까지 올라왔구나 하는 것으로 마음의 위안을 삼아야 했다. 고산 등반에 대한 준비가 부족했고 도전의식과 용기가 부족했다. 발끝 아래 아직도 시커먼 여명에 갇힌 베이스캠프를 바라보며 만감이 교차했다. 나는 여기 왜 왔을까? 전문적인 등반 기술없이도 5000m 넘는 고산에 쉽게 오를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과 남에게 으스대고 싶은 경박함이 이곳에 나를 데려다 놓지 않았을까? 우리 세 명은 무사히 귀환했다. 기진맥진해서 누워있는 세명의 텐트를 일일이 다니시며 뜨거운 물통을 넣어주시며 격려를 해주신 이재일 고문님, 최고령임에도 산행내내 불평 한마디 없으셨던 조인혜 선생님, 수많은 해외산행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전명숙 선생님, 결정적인 순간에 용기를 북돋아주신 박병권 전임 회장님, 타인을 위해 본인의 희생을 기꺼이 감수하셨던 신기섭 선생님, 힘들지만 부드러운 미소를 잃지 않으셨던 문상은 선생님, 애틋한 부부애를 과시하신 유승훈 등반대장님 부부, 산행후미에서 묵묵히 걸으며 모든걸 챙겨주신 노민관 회장님께 존경과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후회가 많으면 생각이 짧았던 거다. 괴로움도 즐거움에 속할까? 다시 한번 도전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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