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순 선생 영전에
김종순 선생 영전에
  • 의사신문
  • 승인 2018.05.28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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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기 서울대병원 핵의학과 교수 호곡

 

2018년 5월 17일 안타깝게도 김종순 선생이 불의의 사고로 우리 곁을 떠났다. 우리 사회가 내분비내과와 핵의학뿐 아니라 방사선 인체영향 등 방사선 의학을 전공한 유수한 전문가를 잃은 것이다.

김종순 선생과 나는 의과대학 동기동창이다. 우리 두 사람 모두 얌전하고 조용한 타입이어서 학생 때에는 교류가 거의 없었다. 그 당시는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이 옛날 시계탑 병원으로 작아서 전공의를 38명만 뽑았다. 160명 졸업생 중에서 나머지 학생들은 전국에 있는 수련병원으로 흩어졌다. 나는 서울대학병원에서 내과를 전공하였고 그는 한국전력 부속병원인 한일병원 내과에서 수련을 받았다. 전문의 시험을 앞 두고서야 다시 만나서 같이 공부를 하였다.

그의 학교생활에 관련된 해프닝이 있다. 대학 졸업 후 20년 뒤인 어느 날 처가 집 엘리베이터를 탔다가 우연히 낯이 익은 남자를 만났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서로 확실치 않아 쳐다 만 보다가 다니던 학교를 맞추어 보자고 했단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는 다르고 마침내 같은 의과대학을 같은 해에 졸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김종순 선생과 다시 인연이 연결된 것은 내가 전공의와 군의관 생활을 마치고 국립의료원에 있다가 서울대학교로 자리를 옮기던 때였다. 내과와 핵의학과를 겸직하던 내 자리를 그에게 부탁하여 인계하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 핵의학은 큰 인재를 한 명 발굴하게 된 셈이었다. 국립의료원에서 그는 핵의학에 재미를 느끼고 정열을 쏟아 짧은 시간에 많은 업적을 내었다. 그 후 한일병원에 핵의학과를 신설하고 복귀하였다. 1980년대 초기에 `영광 원자력발전소 무뇌아' 사건으로 고창순 교수님이 책임 맡은 역학 조사에 같이 참여하면서 우리는 형제 같은 우정을 쌓게 되었다. 죽이 맞아 급기야는 서울 근교에 주택지를 같이 구입하여 장래를 설계하기도 하였다.

정부와 국민의 의견에 따라 역학조사가 장기화 되었다. 우리는 10여 년 간 벽지에 있는 네 곳의 원자력발전소를 드나들면서 나름대로 보람을 느꼈다. 역학조사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주민과 공기업인 한국전력의 견고한 관료주의가 우리 앞을 가로막기도 하였다. 주민들을 설득하고 공기업의 생태에 적응하면서 일을 성사시키는, 평범한 의사에게는 쉽지 않은 역할을 그는 잘도 수행하였다. 아마도 학창시절 송촌 의료봉사 동아리에서 익힌 경험과 능력 때문이리라. 그의 열정과 비전에 감화된 한국전력 측을 설득하여 산하에 〈방사선보건연구원〉을 개설하고는 초대 원장이 되었다. 나는 그의 추진력과 탁월한 조직관리 능력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 연구소는 원전사고에 대비한 비상진료, 방사선 안전 관리, 피폭 예방, 원전종사자 관리뿐 아니라 저용량 방사능의 인체 효과에 관한 수준 높은 연구를 수행하였다.

그는 점차 핵의학과 방사선생물학 분야의 대가로 인정받아 서울의대, 가톨릭의대의 초빙교수가 되고 여러 국내외 학회에서 요직을 맡아 활동하였다. 마침내 그의 뛰어난 리더십이 인정 받아 원자력병원을 확대 개편한 〈한국원자력의학원〉의 초대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때 나는 원장 선정 심사위원이 되어 같이 할 수 있었다. 우리의 우정은 2005년 초 내가 조기위암으로 수술을 할 때 더욱 익어갔다. 당시 우리는 이명철 선생님이 회장이 되어 세계핵의학회를 2006년에 서울에서 개최할 예정이었다. 세계학회 사무총장인 내가 아프자, 그는 국내 조직위원회 사무총장이 되어 나와 같이 학회를 준비하였다. 정말로 우리 둘은 서로 이해하고 양보하여 큰 소리 한번 내지 않으면서 협력해 학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다. 그의 원만하고 성숙한 인품 덕이었다. 지금도 무척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그의 어릴 때부터 한결같은 꿈은 경희대 김찬삼 교수처럼 세계여행을 하면서 외국 풍물을 익히는 것이었다. 의사가 된 것도 그 꿈을 현실화하기 쉽다고 생각해서 였다. 실제로 세계일주를 3번한 김찬삼 교수 만큼은 못하였으나 적지 않게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아시아와 유럽은 물론 남미 시골 구석까지 여행하였고 최근에는 한일문화유적에 관심이 많아 일본을 자주 들락거렸다. 태평양 솔로몬 군도에서 큰 조림사업을 하던 P회장이 현지 근무할 의사를 나에게 찾아주기를 부탁하여 만나서 희망을 전달하기도 하였다.

그는 평범한 용모이나 항상 웃음을 띠고 있어 이웃집 아저씨 같은 순박한 인상이다. 여기에 인성도 좋아 어디를 가나 누구에게나 호감을 얻고 쉽게 사귀고 친해지는 타입이다. 자신의 말대로 변화를 좋아해 여행을 즐기고, 근무지도 자주 변경하고 또 새로운 일자리도 잘도 찾았다. 이번에도 일본에 오기 직전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를 방문하였고 다음에는 알래스카로 떠날 예정이었단다.

그는 왜 그토록 여행을 즐겨 했을까? 새삼스럽게 그가 떠난 후 나에게 떠오른 질문이다. 내가 평소에 느꼈던 대답은 그의 넓은 시야와 정열을 채우기 위해, 또 우리 것에 대한 애정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외국 여행에서 가능한 모든 풍물을 보고 익혀서 우리 사회에 반영하려고 애쓰는 한편, 우리 과거를 살피고 재조명하여 자부심을 가지고자 했다.

그는 진지한 아마추어 인문학자였다. 예사롭게 경치만 구경하는 것이 아니고 역사, 지리, 사회상을 분석해 우리 발전에 연결시키고자 하였다. 일본에서 우리 선조의 발자취를 찾아 간 두 차례의 규수 여행기를 그의 블로그에서 보았다. 김 선생이 얼마나 열정을 가지고 준비하고 전문가 못지 않게 공부하고 지식을 쌓았는지 놀라게 된다.

무엇 보다도 그는 영원한 방랑자였다. 스스로 역마살이 있다고 했다. 사실은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이면 모두 마찬가지여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김 선생, 우리 보다 앞서서 저 세상까지 그렇게 빨리 가지는 말 것을!

탁월한 의학자이면서 진정한 인문지리 학자를 꿈꾸던 우리 사랑하는 우리 벗 김종순 선생! 강 건너 피안에서 다시 만나 우정을 나누기를 기약하면서 이별합니다. 영원한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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