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11:38 (금)
늙음 - 꺾임과 즐거움의 성숙
늙음 - 꺾임과 즐거움의 성숙
  • 의사신문
  • 승인 2018.05.08 11: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늙음 오디세이아 〈28〉 
유 형 준CM병원내분비내과 과장시인·수필가

고려청자를 극찬한 `수중금(袖中錦)'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는 중국 남송의 태평노인의 본명을 확인할 수 없다. 다만, 근심 걱정 없이 성격이 느긋하고 태연함을 의미하는 태평을 별명으로 썼던 그도 늙음에 관해선 심사가 마냥 태평치는 않았던 흔적은 볼 수 있다. 조선시대 후기의 사상가인 이익이 80세 되던 해에 집안 조카들이 정리해 편찬한 `성호사설'에 실려 있는 태평노인의 `노인 십요[十拗, `10가지 꺾임'의 뜻]'는 노인이 좌절하는 10가지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대낮에는 꾸벅꾸벅 졸음이 오고/밤에는 잠이 오지 않으며
곡할 때는 눈물이 없고/웃을 때에는 눈물이 흐르며
30년 전 일은 기억되어도/눈앞의 일은 문득 잊어버리며
고기를 먹으면 뱃속에 들어가는 것이 없이/모두 이 사이에 끼며
흰 얼굴은 도리어 검어지고/검은 머리는 도리어 희어지고

다산 정약용은 71세에 자신의 노년 모습과 일상의 이야기를 6수로 이루어진 한시 `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로 읊었다. 그 뜻이 쉬이 드러나게 긴 시를 필자 나름대로 추려 본다.

이제는 머리털이 하나도 없으니/감고 빗질하는 수고로움이 없고/백발의 부끄러움 또한 벗어나도다
치아 없는 게 또한 그 다음이라/절반만 빠지면 참으로 고통스럽고/쑤시다가 때로 눈물이 났었는데/이제는 걱정거리 전혀 없어/밤새도록 잠을 편안히 잔다네 
눈 어두운 것 또한 그것이라/평생 동안 문자에 대한 거리낌을/하루아침에 깨끗이 벗을 수 있네/이젠 안개 속의 꽃처럼 눈이 흐리니/눈초리를 번거롭게 할 것 없고
귀먹은 것이 또 그 다음이로세/세상 소리는 좋은 소리가 없고/모두가 다 시비 다툼뿐이나니/귀막이 솜을 달지 않고도/천둥소리조차 점점 가늘게 들리고
붓 가는 대로 마구 씀일세/흥이 나면 곧 이리저리 생각하고/생각이 이르면 곧 써 내려 가되/나는 바로 조선 사람인지라/조선 시 짓기를 달게 여길 뿐일세
때로 손들과 바둑 두는 일인데/반드시 가장 하수와 대국을 하고/강한 상대는 기필코 피하노니/이것으로 소일이나 하면 그만이지/뭐 하러 고통스레 강적을 마주하여/스스로 곤액을 당한단 말인가
태평노인의 꺾임도 다산의 유쾌함도 모두 늙음의 드러나는 모양이고 과정이고 본질이다. 늙음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 묘사가 다를 뿐이다. 나이 들어 쇠약해진 쪽을 주로 쳐다보면 M여진 노쇠이고, 그럼에도 -나이 들어 모양과 기능이 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쓸모들을 빠뜨리지 않고 챙기면 유쾌한 성공노화다.
독일의 소설가이자 시인인 헤르만 헤세는 `늙음은 젊음만큼 인생의 한 가지 좋은 숙제'라고 했다. 이 숙제를 잘 풀어내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선택에는 각자의 자유의지가 넉넉히 허용된다. 성공노화로 볼지 아니면 노쇠로 볼지의 시각 선택이 스스로의 몫이듯이. 그렇다면 헤르만 헤세는 어느 쪽을 택했을까? 그의 시 `늙어가기'의 마지막 연, 그리고 `늙어가는 것'의 역시 마지막 연을 옮겨 답에 대신한다.

그럼에도 난 계속 힘껏 싸우겠다/세상과 맞서겠다.
영웅이 되어 승리하지 못한다면/투사로서 쓰러지겠다. - `늙어가기'

따뜻한 벽난로 앞에서
우리에게 좋은 붉은 포도주를 마시면서
마지막으로 평온한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러나 나중에, 아직 오늘은 아니다! - `늙어가는 것'

여든 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뜨기까지 끊임없이 자기실현을 추구하며 철학과 종교와 인간을 심밀하게 그려내어 `인류의 정신적인 스승' 이라 불리는 헤르만 헤세의 노후는 성숙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의 친구였던 위대한 정신 분석가 칼 융(Carl Jung)은 그가 성숙한 늙음을 지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프랑스 작가 알퐁스 도데는 `누구나 늙는다, 그러나 성숙해지는 사람은 드물다.' 고 했다. 일차적으로 다가오는 늙음이 제시하고 요구하는 방향과 대응에 무리 없이 맞추어 가는 순응보다 아름다운 순응은 없다. 영국 쪽 노인의학자들은 이러한 순응을 `이차 노화'라고도 한다.

예를 들면 반응 속도가 느려지면 적극적으로 운전 속도를 늦추거나 아예 운전을 안 하는 것이다. 늙음을 살피고 겪는 노쇠의 시각도 성공노화의 시각도, 좌절도 유쾌도 모두 아름다운 순응이다. 어느 한 편을 추켜세워 다른 쪽을 타박할 일이 아니다. 어느 쪽이든 늙음의 안팎을 명징(明澄)하게 받아들여 치르고 있다. 송나라 노인은 좌절을 새겨 태평노인으로, 다산은 버리고 내려놓은 유쾌한 늙음을, 헤세는 오늘의 투사로 모두 열심히 `늙어가고', 아니 `성숙해 가고' 있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