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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모자 모임
빨간 모자 모임
  • 의사신문
  • 승인 2018.04.30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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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 오디세이아 〈27〉
유 형 준CM병원 내분비내과 과장시인·수필가

`빨간 모자 모임' 본디 영문 이름은 `Red Hat Society'다. `빨간 모자 모임'은 취향이 같은 여성들끼리 재미와 우정의 힘을 통해 삶을 풍요롭게 하는 여성들의 국제 모임이다. 1997년 가을 캘리포니아 주 풀러턴 출신의 쿠퍼가 애리조나주 투손을 여행하던 중에 7달러 50센트짜리 중고 빨간 중절모를 샀다. 그즈음 마침 썩 친한 친구의 생일을 앞두고 어떤 선물을 할까 곰곰 생각하던 중 문득 제니 조셉(Jenny Joseph)의 시 `경고(Warning)'가 떠올랐다.

“할머니가 되면, 난 보라색 옷을 입고,
빨간 모자도 쓸 거야, 맞지도 않고, 어울리지도 않겠지만.
연금으로 브랜디, 여름장갑, 새틴 샌들을 사놓고,
버터 살 돈이 없다고 말하겠지.
피곤하면 아스팔트에 주저앉아
상점 시식을 먹어치우고 경보 벨도 눌러보고
그리고 지팡이로 난간도 긁어보고 
조심스럽던 젊은 시절에 못했던 것들을 할 거야.
비오는 날 슬리퍼 바람으로 나가서
다른 집 정원에서 꽃을 꺾고
침 뱉기도 배울거야.
당신은 끔찍한 옷을 입고 더 뚱뚱해질 지도 몰라.
그리고 단숨에 소시지 3파운드를 먹어치우거나
일주일 내내 빵과 피클만 먹을 수도 있고.
펜, 연필, 잔 받침 같은 걸 상자 속에 모아둘 지도 모르지. 

그러나 지금 우리는 깔끔한 옷을 입고
집세를 내야지, 그리고 거리에서 욕을 해선 안  되고
아이들에게 좋은 시범을 보여야지.
우리는 식사에 초대할 친구도 있어야하고 신문도 읽어야 해. 

그러나 이제 난 조금씩 연습해봐야 하지 않을까?
갑자기 늙어 보라색 옷을 입기 시작했을 때.
나를 아는 사람들이 기절초풍하지 않도록.”
- `경고' 전문

그녀는 친구에게 자신의 빨간 모자에 늙음의 용기를 듬뿍 담아 선물했다. 빨간 모자에 담긴 제니 조셉의 메시지는 쿠퍼의 빨간 모자를 선물 받은 친구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녀들은 자신의 빨간 모자를 쓰고 평생의 꿈을 이루며 즐거움과 우정으로 가득 찬 삶에 대한 새로운 소망을 만끽하는 경험을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비롯된 활동은 결국 몇몇 여성들로 하여금 자주색 복장에 빨간 모자를 쓰고 1998년 4월 25일 `빨간 모자 모임'을 결성하게 하였다. 지금은 국제적 사회단체로 각국에 20,000 개 이상의 지부가 활동하고 있다.

올해 85세인 영국의 제니 조셉은 우리나라에도 그녀의 시집이 번역 출간된 적이 있지만 그리 널리 알려진 시인은 아니다. 관심과 인기를 끈 것은 `경고'가 1996년 영국 국영방송국 BBC에서 실시한 투표에서 `전후 세대의 가장 사랑받는 시'로 선정되면서 부터다. 스물아홉 살의 제니 조셉이 시를 발표한 지 40년 가까이 지난 뒤였다.
색다른 발상도 뛰어난 시적 표현도 없는 시가 유명해진데 대해선 당시에 많은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전쟁 기간 동안 국가의 배급에 의존해 가난한 젊은 날을 살아내야 했던 이들에게 `경고'는 상실 당했던 시간에 대한 보상과 함께 노년을 준비하고 싶다는 당당한 기대감을 선사하였다. 특히 시의 2행에 나오는 `빨간 모자(Red Hat)'는 속박 당한 상실의 삶을 벗어날 수 있는 노년의 여유를 상징하는 심벌로 작동하였다. 그 작동의 하나가 `빨간 모자 모임' 활동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유명 작가의 한 사람인 이츠키 히로유키의 에세이집 중에 `타력(他力)'이 있다. `타력'은 글자 그대로 자신의 힘이 아닌 남의 힘을 가리키는 말로 불교에서 나온 용어다. 일본에선 고승의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을 뜻하기도 하는데, 다른 일 또는 다른 것에 기대어 일을 성취함을 이른다. 히로유키는 `타력'을 이렇게 빗대어 설명하고 있다.

“엔진이 달려 있지 않은 나룻배는 바람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는 달릴 수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바람이 불면 어떻게든 되겠지만, 산들바람조차 불지 않는다면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룻배 위에서 아무리 애써봤자 헛수고입니다. 타력의 바람이 불지 않으면서 사실 우리의 일사도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법입니다. ---〈중략〉 --- 그러나 바람이 불어왔을 때 나룻배의 돛을 내리고 앉아서 졸고 있다면 달릴 기회도 놓치게 됩니다. 따라서 불지 않는 상태가 아무리 계속돼도 꾹 참으며 주의 깊게 바람이 불 낌새를 기다리고, 하늘을 살피고, 또 바람을 기다리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 `타력' 이츠키 히로유키 저/채숙향 역

생각하기에 따라 삶은 괴로움과 고통의 바다다. 어차피 헤쳐가야 할 바다라면 `바다를 바다'라고 인정해야 한다. `바다를 산이나 들'로 우기면 멈출 수밖에 없다. 풍파를 견디며 나아가는 일엔 기묘한 타력이 유별난 활력으로 도움을 주곤 한다. 늙음도 그렇다. 육신과 영혼의 안팎에 일어나는 늙음의 못마땅한 면면들도 그렇고. 늙음의 몸과 마음을 온통 흔들어댈 팔풍(八風)에는 못 미쳐도 `늙을 힘'이 일어야 제대로 늙을 수 있다. `빨간 모자 모임'의 쿠퍼와 열렬 회원들의 늙음을 떠받치고 있는 타력은 빨간색 모자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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