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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을 힘
늙을 힘
  • 의사신문
  • 승인 2018.03.13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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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 오디세이아 〈23〉
유 형 준CM병원 내분비내과 과장시인·수필가 

“오늘 저녁은 뭘 먹지?”
“되도록 부드러운 걸로 한 쪽으로만 씹어야 하나.”

입을 최대한 크게 벌리고 이와 잇몸을 통째로 드러내고 임플란트 시술을 받는 내내 피치 못할 저녁 식사 약속에 여러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한바탕 이와 잇몸을 총 동원한 시술 중간에 입안을 가시려 몸을 세워 눈을 뜨니 문득 진료실 한편의 포스터가 눈에 들어온다. `건강 치아 - 건강 장수'
`호모사피엔스' 증후군을 일으킨 문화사가인 유발 하라리는 `호모데우스-미래의 역사'에서 “21세기에 150세까지 살 수 있지 않을까”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친절한 설명을 덧붙여 가며.

“사람들은 훨씬 더 오래 일할 것이고 90세에도 자기 계발을 하여야 할 것이다. 또 사람들은 65세에 은퇴하지도, 새로운 생각과 포부를 지닌 신세대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지도 않을 것이다”

그의 창의적 능력에 대단히 감탄하면서도 사람의 수명에 관한 예견은 지나치게 묘연한 게 미덥지 않아 한국인의 수명에 관한 세계보건기구의 객관적 예측을 살펴본다. 수개월 전 발표한 바에 따르면 2030년에 태어나는 한국 여성의 기대수명은 91세, 남자는 84세에 거의 이를 것이란다. 복지제도, 의학 발전, 영양 개선, 교육 등의 덕이라 한다. 분명히 평균 수명이 길어지고 있고, 노인의 수가 늘고 있다. 더 분명한 것은 얼마 전과 다르게 은퇴를 코앞에 두고 더 일할 데가 없나하고 여력 발휘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할 일이 없고 건강이 나빠지고 쾌락이 줄고 죽음이 가까워진 사람이 노인'이라는 세네카의 구별을 빌리지 않아도 우리네 수명이 길어진다면 다만 죽음까지의 거리가 다소 멀어지는 것일 뿐이다. 일도 건강도 쾌락도 줄고 약해지는 게 자연스럽다. 설령 몸이 튼튼해져서 다소 젊은 꼴이 보태져도 젊은 그대로는 아니다. 여전히 나날이 늙어 가며 늙은 채로 늙어야 한다. 솔직하게 말하면, 늙긴 늙되 건강을 좀 더 살펴가는 것일 게다.

`가을 더위와 노인의 건강'이란 속담을 빌지 않더라도 노인의 건강이 아무리 장하더라도 그 기운이 오래 갈 수 없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더 오래 산다는 말은 지금보다 더 오랜 기간 늙어야 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몽테뉴는 `우리가 세상에 나올 때에 조산부(助産婦)가 필요하다면, 우리를 이 세상에서 내보낼 때에는 조사부(助死婦)가 필요하다.'고 `수상록'에 적고 있다. 태어날 때도 죽을 때도 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생로병사 네 가지 고통 중 어느 하나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아플 때도 정성을 다하여 섭생으로부터 의학적 효능으로부터 절절한 힘을 구한다.

늙는 것도 다르지 않다. 힘이 있어야 한다. 늙을 힘. 하루하루 열심히 늙어 갈 힘. 부지런히 늙다가 씹을 때마다 통증이 오거나 감당할 수 없는 염증으로 괴로운 지경엔 임플란트 시술을 견뎌낼 만큼의 힘 정도는 남아 있어야 한다. 그래야 옮겨 심은 인공치아가 제대로 서서 늙음을 받쳐주는 힘을 쓸 수 있다.

늙음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을 위해 잇몸까지 드러내어 임플란트를 심는다. 어릴 적 젖니 빠진 자리에 간니가 자라 여태까지 한 끼도 두덜거림 없이 저리도록 씹고 씹어 영양과 힘을 제공해왔다. 젖니는 빠지고 영구치가 돋지만, 이번엔 간니를 빼고 인공치아를 심는다. 이제 낡고 허약해져 뽑혀 나가는 처지가 된 영구치라는 명칭의 참뜻을 새삼 깨닫는다. 무한히 사용할 수 있다는 무기한 보장성 명칭이 아니라 그렇게 오래 써야할 것이니 소중히 살살 사용하라는 규범성 이름이었음을.

“조금 아프실 겁니다”

이제 잇몸 뼈에 임플란트의 기둥을 심어 세우기 위해 마취를 한다. 무감각해진 입 주변에서 시작되는 다양한 움직임의 소리들이 소란하다. 진동기 소리, 시술 팀원들의 간간이 빠르고 높은 숨소리와 말소리가 섞인 기척, 뼈에 인공치아를 박는 망치 소리. 인공 광물체가 생명력을 얻어 새로 태어나는 소란에 문득 분만실의 소리와 기척이 떠올랐다. 임플란트는 새로운 이가 태어나 돋아서는 것이다. 사물에는 `낡다'를 쓰고 사람엔 `늙다'를 쓴다. 늙어 쓸모없어진 정들었던 이는 늙어가는 몸을 떠나 낡은 사물이 되고 대신에 사물이었던 인공치아가 늙어 가는 몸의 일부가 되어 새 힘을 보태고 있다.

매일 서른 번씩 이를 맞부딪쳐 쪼아서 120세까지 장수했다는 한나라 괴경이 살던 그런 한가로운 시절이 결코 아니지만, 최소한 입안에 들어온 모든 음식은 단물이 나올 때까지 꼭꼭 씹을 요량으로 환갑이 넘도록 꼭 붙어 지내던 이 한 개를 내어주고 늙어갈 힘, 맞쪼는 힘을 심는다. 베르나르디노가 600여 년 전에 했던 말과 함께. “당신네는 오래 살고자 했고, 오래 살기를 원했으며, 오래 살지 못할까 걱정했소. 이제 오래 살게 되자 당신네는 불평하오. 누구나 오래 살기를 바라지만 아무도 늙으려고 하지는 않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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