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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해로 - 새우 두 마리와 미당
부부해로 - 새우 두 마리와 미당
  • 의사신문
  • 승인 2018.01.15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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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 오디세이아 〈17〉
유 형 준한림의대 내분비내과 교수시인·수필가

부부가 한평생 같이 살며 함께 늙어가는 부부해로(夫婦偕老). 부부금슬에 세월의 길이도 얼마간은 되어야 부부해로라 한다.

예를 들면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그린 백거이의 `장한가(長恨歌)'에 나오는 비익조(比翼鳥)나 연리지(連理枝)도 넉넉히 오래 날고 자라야 해로라고 부른다. 각 사람마다 살아가는 행로조차도 구구한데 더욱이 남남이 만나 세파를 헤쳐 늙어가는 해로는 그지없이 갈래가 더 많아 그 표현 또한 다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먼저 그림으로 표현하는 해로다. 새우는 겉뼈대에 갑옷처럼 온몸에 둘러 입고도 급할 때 허리를 사용하여 재빨리 움직인다. 이러한 허리의 유연성처럼 그림속의 새우는 만만순(彎彎順)을 상징한다. 굽을 `만(彎)'을 겹쳐 쓰고 순할 `순(順)'을 보태어 신산한 삶을 굽이굽이 거쳐 순조롭고 평탄하게 풀려지길 기원하는 그림이다. 이처럼 만만순을 의미하는 새우 중에서도 바다새우는 등이 굽고 수염이 길어 `바다 늙은이'라는 의미로 해로(海老)라 하는데, 부부해로(夫婦偕老)의 `해로'와 발음마저 같아 두 마리의 새우를 그린 그림은 부부가 해로하길 축원할 때 그린다. 머리가 흰 백두조(白頭鳥) 두 마리를 그린 그림도 부부해로를 뜻한다. 부부 둘 다 검은 머리가 하얀 파뿌리 되도록 해로하라는 기원을 담고 있다.

해로를 글로 나타낸 작품은 적지 않다. 그 중에서 아내에 의지하여 해로의 중간 중간을 매듭지어 시로 노래한 미당 서정주를 기억한다.

나 바람나지 말라고/아내가 새벽마다 장독대에 떠 놓은/삼천 사발의 냉숫물//내 남루(襤褸)와 피리 옆에서/삼천 사발의 냉수 냄새로/항시 숨쉬는 그 숨결 소리//그녀 먼저 숨을 거둬 떠날 때에는/그 숨결 달래서 내 피리에 담아//내 먼저 하늘로 올라가는 날이면/내 숨은 그녀 빈 사발에 담을까 - `내 아내'

1969년 3월, 미당 서정주는 만 31년째 부부로 살아온 아내의 숨결을 인연의 끈으로 과거 현재 그리고 내세를 노래한 시다. 바람처럼 살았던 50대 중반 남편의`바람'에 대한 진솔한 고백과 함께. 약 30년 후, 미당은 1998년 `현대문학' 1월호에 `내 늙은 아내'를 발표한다.

내 늙은 아내는 아침저녁으로/내 담배 재떨이를 부시어다 주는데/내가/“야 이건 양귀비 얼굴보다 곱네/양귀비 얼굴엔 분때라도 묻었을 텐데?”/하면/꼭 대여섯 살 먹은 계집아이처럼/좋아라고 소리쳐 웃는다/그래 나는 천국 아니 극락에 가더라도/그녀와 함께 가볼 생각이다 - `내 늙은 아내'

미당은 10년 넘게 치매에 걸린 아내를 곡진히 보살폈다. 손발톱 손질은 물론 어디든 손을 잡고 다녔다. 미당은 1999년 2월 3일 `겨울 어느 날의 늙은 아내와 나'를 발표한다. 이 시는 그의 마지막 절창이었고 당시 나이 만 84세였다.
 
오랜 가난에 시달려 온 늙은 아내가
겨울 청명한 날
유리창에 어리는 관악산을 보다가
소리 내어 웃으며
“허어 오늘은 관악산이 다 웃는군!”
한다.
그래 나는
“시인은 당신이 나보다 더 시인이군!
나는 그저 그런 당신의 대서(代書)쟁이구…”
하며 덩달아 웃어본다.
-`겨울 어느 날의 늙은 아내와 나'

팔십 평생을 대서쟁이처럼 글 속을 떠다니던 사내를 말없이 참고 따라준 늙은 아내에게 바치는 나직한 절창이다. 아내 방옥숙 여사가 1999년 10월 10일 숙환으로 세상을 떠나자 미당은 곡기를 거의 끊고 맥주로 연명하다가 12월 24일 만 85세를 일기로 마치 서둘러 길 떠나듯 부인 곁으로 갔다. 부인 사후 75일만이었다. 자웅의 사이가 깊어 한 쪽이 죽으

면 상대가 마저 따라 죽는다는 `시경(詩經)'에 등장하는 저구(雎鳩)가 떠오른다.

어느 남편이 아내의 늙음에서 자신과 자신의 세상을 발견하곤 이렇게 속마음을 드러냈다. “아내가 늙어 감은 세상이 늙어가는 것이다. 아내의 늙음은 그저 한 개의 낱말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둘 사이의 씨앗이며 싹이고 꽃대와 꽃, 열매, 그리고 낙엽이다. 또한 바람, 햇볕 그리고 번개며 우레다.” 나이 들어 어쩔 수 없이 머리가 희어지고 새우처럼 등이 굽어가는 남편과 아내. 둘이 심고 꽃 피고 열매 맺고 그리고 낙엽으로 시들어가는 해로는 역시 만만순(彎彎順)한 자연의 한 부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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