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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꿈
노년의 꿈
  • 의사신문
  • 승인 2017.12.12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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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 오디세이아 〈13〉 
유 형 준 한림의대 내분비내과 교수 시인·수필가

고향인 오스트리아 빈을 떠나 함부르크에서 한 수출회사의 견습생으로 일하던 젊은 피터 드러커는 베르디의 오페라 〈폴스타프〉를 보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부친의 간청으로 함부르크 대학 법학부에 입학은 했지만 관심은 다른 데로 쏠려 있었다. 개막 한 시간 전부터 극장 앞에서 기다렸다. 가난한 견습생 처지라 막이 오르기 직전에 팔리지 않은 제일 싼 표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세상 모든 것이 농담이로다.”라는 대사로 널리 알려진 오페라 〈폴스타프〉 는 베르디의 유일한 희극이다. 당대 가장 유능한 작사 대본가인 아리고 보이토가 셰익스피어의 〈윈저의 아름다운 부인들〉과 헨리 4세의 이야기를 잘 섞어 지은 희극으로 주인공의 이름이 폴스타프다.

큰 감동을 느낀 드러커는 바로 〈폴스타프〉 관련 자료를 찾아보다가 더 큰 감동을 받았다. `인생에 대한 열정과 유쾌한 활기가 넘치는 작품을 만 76세에 작곡하다니…' 게다가 “이미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로 인정받고 계신데, 이처럼 벅찬 주제를 가지고, 더구나 적지 않은 나이에 굳이 힘들게 오페라 작곡을 계속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베르디의 대답을 피터 드러커는 평생 잊을 수 없었다.

“나는 일생 동안 완벽하게 작곡하려고 노력했지만, 늘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내겐 도전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피터 드러커는 아흔 다섯 살로 일생을 마치는 순간까지 세계적인 경영학 저서를 집필했고, “가장 훌륭한 저서가 어느 것입니까?” 라는 질문에 늘 “다음에 나올 책입니다.”라고 베르디를 닮겠다는 꿈을 키워 갔다,

드러커의 꿈은 이루어졌다. 드러커의 삶을 성공적 삶이라 불러 손색이 없다. 그러나 설령 청장년 시절의 활약은 성공이라 할 수 있지만 적어도 노년의 `베르디 닮는' 꿈꾸기는 의학적 기준으로든 사회학적 정의로든 `성공'으로만 이름 붙이기엔 아무래도 마뜩찮다.

렘브란트의 명화 〈탕자의 귀향〉에 매료되어 동일한 제목의 책을 쓴 저자이며, 우리 세대의 키엘케골로 불리는 헨리 나우웬은 성공한 삶과 열매 맺는 삶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이르고 있다.

“성공은 힘과 통제력과 존경할만한 태도에서 나온다. 성공한 사람은 창조적 에너지를 지니고 있고, 그 에너지를 발휘하고 통제할 능력을 갖고 극대화 시킬 수 있다. 따라서 보상과 명성이 크게 뒤따른다. 그러나 열매는 연약함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열매는 독특한 특성을 갖게 된다. 예를 들면 어린 아이는 상처받기 쉬운 연약함 속에서 잉태된 열매이며, 공동체는 서로 상처를 보듬는 가운데 생겨난 열매이고, 친밀함은 타인의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자라난 열매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참된 기쁨을 주는 것은 성공이 아니라 열매 맺는 삶이라는 것을 서로 서로 일깨워준다.”

〈피터 드러커에게 경영을 묻다〉의 저자 이재규는 피터 드러커의 철학을 다음의 몇 문장으로 요약하고 있다. “피터 드러커가 경영학을 연구한 최종 목표는 `지상에서 행복한 삶의 실현' 이었다. 그가 말하는 마지막 통찰은 `성공하려는 의지'에서 `공헌하려는 의지'로 초점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지식사회의 근로자들은 모두 생산수단인 지식을 보유하고 있다. 그 지식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개인적인 `성공'을 넘어 보다 매력적이고 보다 나은, 그리고 더 기능적인 사회가 되도록 `공헌'해야 한다. 바로 `성공을 넘어 공헌으로'다.”

그렇다. 피터 드러커는 성공함에 매이지 않은 열매 맺음을 꿈꾸었다. 만일 성공의 꿈만을 꾸었다면 노년의 꿈을 꿀 수 없었을 것이다. 열매 맺는 꿈을 꾸는 사람에겐 은퇴가 없다. 그동안 쌓아온 성공과 실패의 축적 위에 꾸는 꿈은 젊은 시절의 꿈과 다르다. 더 여물면서 유연하다. 젊은이들의 수고에 따른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혹여 그 결과가 실패라면 격려로 얼싸안으며 꾸는 꿈. 성공을 꿈꾸지 않고 열매 맺는 꿈을 꾸는 일은 더 오래 할 수 있다. 열매 맺는 꿈은 정년이 없다. 아무리 늙을지라도 그동안 자신의 목표에 닿고 비전을 이루고자 달려온 성공이 이젠 해와 달과 꽃과 낙엽과 열매의 순환조화를 응시하는 열매로 응축되어가는 꿈을 꿀 수 있다.

만 87세를 산 베르디는 단출한 장례식을 유언하였지만 밀라노 시민들은 그럴 수 없었다. 하관식이 거행되자 한 시민이 노래를 불렀고 곧 이어 참석한 모든 시민들이 따라 불렀다. 베르디의 대표작인 〈나부코〉의 한 구절이었다.

 “날아가라, 나의 생각이여. 황금날개를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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