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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의 패러독스(Paradox)
평등의 패러독스(Paradox)
  • 의사신문
  • 승인 2017.09.18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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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風書風 〈65〉

커트 보네거트(Kurt Vonnegut)의 단편소설이며, 영화로 제작된 〈해리슨 버거론, Harrison Bergeron〉은 평등의 이상이 완벽하게 실현된 가상의 미래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그들은 신과 법 앞에서만 평등한 게 아니라 집단 사회의 모든 면에서 평등했다. 똑똑한 사람도 없고 잘생긴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힘이 세거나 민첩한 사람도 없었다.” 외관상 모든 시민들을 표준화하고, 잘 짜여진 맞춤형의 평등사회를 관리하고 유지하는 것은 평등 관리국의 관할이며 사회적 책무였다. 지능이 높은 사람들에게는 특수 수신기를 끼워 정교하고 복잡한 사고를 못하도록 일정 시간의 간격으로 그들을 방해한다. 미남 미녀들은 가면을 써야 하고, 힘이 세거나 운동능력이 탁월한 사람들에게는 무거운 추를 달아 행동을 느리게 만들었다.

보네거트는 하향평준화를 초래하는 원론적 평등주의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경제적으로 빈곤층이나 취약계층의 사람들에게 생활조건을 개선해주는 일은 평등에 이바지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상층부에 있는 자들의 사회적 처지를 악화시켜 평등을 이루는 또 다른 방법도 있다. 사실은 후자가 정치적 공리주의와 포퓰리즘으로 처리하기가 더 쉬운 일일지도 모른다. 도덕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평등주의가 일부의 희생을 치르지 않으면서 국민의 경제수준을 전반적으로 상승하게 하고, 더 나은 경제적 효과를 창출할 때라야만 올바른 사회적 평가를 받는다.

많은 문학평론가가 보네거트의 작품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키워드는 `블랙 유머(black humor)'다. 유머에는 인간에 대한 신뢰가 밑바탕에 있지만, 블랙유머에는 오히려 인간에 대한 불신과 절망이 숨어 있다. 불길한 삶과 존재의 근원적 불안함을 상기하는 그의 블랙 유머는 잔인하고 냉철하다. 이 재기발랄한 작가는 자신의 블랙 유머에 관해 이렇게 표현했다. `울 수 없으니까 웃기는 것.', 보네거트의 작품 대부분은 이런 블랙 유머가 짙게 스며있다. 그러나 현실 사회에서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이건 울거나 웃는 블랙 유머의 풍자(諷刺) 수준이 아니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이데올로기적 프로크루테스의 침대, 급진 좌파의 포퓰리즘이 초래하는 `하향평준화'는 국민에게 끔찍한 경제적 대가를 치르게 한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평등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불공평은 다양한 정책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명예 증세로 각색한 부자 증세, 개인의 사적 재산권과 관련된 각종 공과금의 누진세와 부동산 중과세, 경쟁이나 능력에 의한 학교 편성보다는 교육 평준화를 위한 자사고의 폐지와 내신과 수능의 절대평가, 서민의 주거안정과 투기과열을 막기 위한 부동산 정책, 최저 시급의 인상과 이에 대한 불가피한 정치적 개입, 건강보험의 보장성 강화를 목적으로 하는 비급여의 급여화, 지역이나 성별, 특수 계층을 안배한 할당제와 특혜 등, 논란이 많은 현안에는 여전히 여론의 찬반이 엇갈린다.

그러나 여기서 평등주의가 근본주의 형태로 한 발짝만 더 나가면 대단히 위험하다. 사람들이 동일하게 출발하지만(기회적 평등) 결국에는 일부가 나머지보다 더 부유해진다고 한다면, 이를 지켜 본 사람들은 부유한 자들이 분명 더 탐욕스럽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다(결과적 평등). 이를 정치적으로 포퓰리즘화 해버리면, 도덕적 민주주의로 선동된 다수의 폭력은 자칫 창의적인 지식과 재능을 죄악으로 추락시켜 그 해결책을 재분배가 아닌 경멸과 복수에서 찾을 수도 있다.

20세기의 수많은 잔학행위가 평등주의의 이름으로 전개되었는데, 그럴 때마다 자유주의 지식인이나 학자, 경제적인 부유층이 대상이 되어 희생양으로 전락했다. 구소련에서는 부르주아 농민(쿨락, kulak)이 레닌과 스탈린의 손에 의해 절멸되었고, 모택동의 문화혁명에서는 교사와 지식인, 부농과 전(前) 지주들이 모욕과 고문, 살해를 당했다. 김일성의 북한, 캄보디아의 크메르루주 정권하에서도 똑같은 일들이 벌어졌다. 어디 그뿐인가, 동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의 인도인,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의 화교, 전 세계의 유대인이 고향에서 쫓겨나거나 조직적인 인종차별 학살의 희생자가 된 것은 그들 중 부유층이 된 일부를 기생충과 착취자로 몰아붙인 결과였다.

오랫동안 자유와 평등이 서로 상반된 정치경제적 개념으로 사용되어 왔지만, 보네거트의 풍자적 단편에 나타나는 강요된 평등처럼,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 나타나는 억제된 자유 역시 두렵고 혐오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사회 다윈주의 우파는 평등 자체를 부인하고, 전체주의 좌파는 자유에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는다. 오늘날 이러한 이데올로기 근본주의는 사라지고, 정치철학이란 그 이념적 균형을 어떻게 달성하는가에 따라 사회적 정당성을 규정한다. 민주주의 사회는 서로 간 충돌하고 견제하는 이념적 정치세력과의 타협과 흥정에 의해 균형과 상생의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존 롤스(정의론, 분배정의)나 조지프 스티글리츠(불평등의 대가, 분수론)와 같은 세련된 좌파는 평등을 위해 자유의 일부를 희생시킨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노예의 길)와 로버트 노직(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과 같은 자유주의 우파는 자유를 위해 불평등을 다소나마 용인한다. 개인이나 집단의 성향과 사회 조건에 따라 이러한 타협의 결과에는 의견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민주주의가 정착된 사회의 여론은 국가 기반의 프레임과 시스템을 망가뜨리지 않는 한 타협의 결과를 존중한다.

사회주의 좌파의 가치가 평등에 있다면 시장주의 우파의 가치는 효율성에 있다. 5%의 경제성장을 이루는 불평등의 사회와 0.5%의 성장률밖에 안 되는 평등의 사회가 있을 때, 단기적으로는 평등 사회의 효율성 상실이 저소득층의 노동자에게 흘러드는 이득으로 상쇄될 수 있다. 그러나 평등사회에서 장기적으로 나타나는 하향평준화는, 불평등한 사회의 가장 빈곤한 노동자조차도 평등사회의 구성원보다 부유해 진다. 이는 경제학에서 통계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D.M.Hausman, 공급적인 측면에서 본 평등주의의 문제, 1998). 물론 자유주의 우파 경제에서 빈곤층이 느끼는 소득의 양극화, 상대적 빈곤의 감성적인 면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서는 그렇다.

정부의 역할을 최소화하고 각종 규제를 완화하며 민간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시장주의 우파와는 달리, 사회주의 좌파들이 선호하는 정책은 효율성을 희생시키는 측면이 있다. 정부의 역할을 극대화하고, 정부가 직접 관여하는 가격보조, 임금조정, 직접적인 소득 재분배 등은 분명 사회적 순손실을 초래한다. 그렇다고 그러한 손실로 얻는 이득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유지해온 경제 시스템이나 사회적 프레임을 급작스럽게 파괴하지 않으면서 조심스럽게 추진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급진적 좌파가 흔히 저지르는 실수의 대부분은, 바로잡는 법도 모르면서 이것저것 손댔다가 악화될 수 있음에도, 사회적 정의를 부르짖으며 평정과 자제심을 잃는데서 시작한다.

오늘날 좌파든 우파든 자신의 이념적 핵심을 명확하게 밝힐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4차 혁명을 지향하는 시대적 흐름에서 이념의 옷은 죽은 자들에게 입히는 수의와 다름이 없다. 진보적 시각에서 우리 사회를 바라보면 정치적 좌파의 유토피아적 관점, 우파의 비극적 관점 어느 것이나 적절하지 않다.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하는 자유와 평등, 관념적 좌파와 우파는 한 몸체 거울의 양면과 같다. 문명사회는 외골수 근본주의의 대립구조로는 안정적 발전을 담보하지 못하며, 이데올로기적 망상을 지우지 않으면 역사는 퇴행적 폭력의 악순환만이 반복될 뿐이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난 후, 적폐청산이라는 미명 하에 80년대의 좌파 근본주의가 빠르게 부상하고 있다. 10년 전 지리멸렬하게 파산했던 평등과 복지혁명을 주창(主唱)했던 이른바 급진좌파의 귀환이다.

여론을 빌미 삼아 거침없이 쏟아내는 문재인 정권의 경제 정책을 보면, 대통령이 강조한 `큰 정부'라는 어휘가 한 마디로 모든 것을 요약하고 있다. 정부가 복지뿐만 아니라 시장에도 직접 관여하겠다는 얘기다. 시장주의자들이 주장한 `작은 정부'라는 개념은 그리 쉽게 흘려들어서는 안 된다. 20세기 실패한 정치철학의 누적된 경험에서 우러나온 최선의 정치경제적 선택이었다.

소득주도형 경제, 사회적 구조와 시스템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비생산적인 공직의 일자리 만들기, 정규직 전환과 최저시급의 인상으로 인한 노동 수요의 감소, 재정확대와 성장의 둔화가 초래하는 물가 인상과 인플레는 어떻게 할 것인가. 좌파 정권이 벌여놓은 페론의 아르헨티나, 카스트로의 쿠바, 파판드로우의 그리스, 차베스의 베네수엘라에서 나타난 참혹한 상황과 정치경제적 결과를 다시금 되새겨 보라. 재분배의 도덕성, 그러나 평등 원리주의는 하향평준화라는 비효율성의 부작용을 초래한다. 빈곤층의 재정형편과 복지를 향상시키기 위한 평등이라면 이러한 하향평준화는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 의료계에도 비급여의 급여화라는 불똥이 튀었다. 원가의 70% 정도인 현행 의료수가 하에서 예상되는 급여화 항목의 적정수가 이하로의 책정, 의료전달체제의 왜곡, 민간보험의 축소, 일상화된 심평원의 간섭과 삭감 등, 의료계는 정부의 의도를 의심하고 의료의 질 저하로 이어지는 하향평준화를 우려하고 있다. 보장성의 확대는 건강보험의 재정고갈로 이어지고, 큰 폭의 보험료 인상은 불가피하다. 전 정권에서 세금 구조 개편으로 인한 조세저항 사건을 보면, 세금과 다를 바 없는 건강보험료 인상에 대한 납부자들의 저항은 이 정부가 안이하게 대처할 일이 결코 아니다. 김대중 정부의 의약분업 사태 이후에 벌어진 건보재정의 압박은, 의료 소비자인 국민의 부담을 최소화하고 의료 공급자인 의사들만 희생시킨 전례가 있다. 보장성의 확대, 급여화는 정책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신뢰의 문제이기도 하다.

세계 경제는 불황의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카오스 같은 시장의 불안은 아무도 위기를 예측할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김정은의 북한은 핵무기로 우리를 위협하고, 중국은 사드배치를 구실로 경제보복을 예고하고 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봇물처럼 터지는 평등복지에 관한 정책 이슈들, 하향평준화와 재정고갈이 논쟁의 핵심이다. 이 정부의 실체 없는 낙관주의는 어디에서 비롯하는 것인가? 현 정부의 캐치프레이즈인 `사람 중심 경제', 이념적 일방성에서 벗어나 평등과 효율성에 기반하는 진보적 가치를 추구하고, 타협과 절충의 정치로 사회 전체를 통합할 수 있는 열린 시각과 통찰력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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