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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 김노경 명예교수님을 회상하며...
[조사] 김노경 명예교수님을 회상하며...
  • 김기원 기자
  • 승인 2017.07.05 19: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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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항암치료의 선구자_'의학계의 완벽한 표상'으로 한평생
김노경 명예교수

서울의대 김노경 명예교수님이 수개월 동안 투병 끝에 7월 4일 안타깝게 별세하셨다.  

우리 모두가 그 동안 두려워했던 일이 생긴 것이다.
존경하던 스승님과 작별한 슬픔을 참으면서 이 글을 쓴다. 한 마디로 선생님은 의학계의 완벽한 표상이셨다. 명문집안에서 총명한 지능을 가지고 태어나셨다. 학교성적도 항상 최우수였고, 훤칠한 키와 준수한 용모에 인성도 훌륭하고 대인관계도 아주 좋았다. 

선생님은 종양내과를 전공하셨다.
1970년 대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수술과 방사선으로만 암을 치료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미국에서 항암약물치료법을 공부한 후 귀국하여 임상 이용을 정착시키고 새로운 국산 항암제의 개발을 주도하셨다. 또한, 국가적 암 정복사업을 주관하고 서울대학교에서 정년 퇴임 후에도 국립암센터 이사장을 맡아 진료와 연구에 전념하셨다. 결국 암 환자의 1/3이 완치되는 성과를 이루는 데에 기여하셨다. 

선생님은 가장 모범적인 신사이자 의학자였다.
일생을 질병과 싸우는 의사의 본분에 맞춰 살아 오셨다. 많은 시간을 집중하여 연구와 진료에 매진하셨다. 철학자 칸트처럼 정시에 지하철로 출퇴근을 하면서, 일과 후 저녁 모임이나 회식은 가급적 자제하셨다. 교수 위치에 맞게 청렴하고 절제 된 생활을 했다. 야유회에서 유흥을 즐길 때에도 항상 애창곡은 동요였다. 

선생님은 자기 일에 철저하셨다.
한번은 내가 전공의 시절 선생님께서 댁으로 우리들을 초청하셨다. 넓지 않은 크기의 구반포 아파트에서 푸짐한 저녁식사는 물론 각종 주류를 준비하셨다. 식사 후 즐길 카드놀이를 위하여 3벌의 카드와 신권의 지폐까지 마련해 놓으셨다. 심지어는 회식 후 가질 음주를 위하여 우리 병원의 주선(酒仙)인 김정룡 선생님도 초청하셨다.  

선생님은 우리병원에서 환자뿐만 아니라 의료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타 교수였다. 시니어 교수들은 미래의 의료계를 짊어질 든든한 대들보로 신임하였고, 동료들은 선생님과 친구인 것을 긍지로 삼고 자랑스런 대표로 인정하였다. 전공의들에게는 롤 모델이었고, 학생들에게는 가장 인기 있는 명강의 교수였다. 선생님은 슬라이드 사용을 자제하고 이해하기 쉽도록 멋진 글씨로 칠판에 판서하면서 강의하셨다. 진료에 있어서도 다른 과에서 모든 환자의 내과적 문제를 전공분야에 관계없이 김노경 선생님에게만 자문을 의뢰하는 기 현상이 벌어졌다.  

선생님의 이러한 성취는 사실은 집중적인 노력의 결과였다. 미국에서 귀국하신 후 내과 의국 앞 막힌 복도에 가설 연구실을 설치하여 최신 암치료법을 독려하셨다. 최신치료법의 홍보를 위하여 ‘암과 같은 존재’라는 시중의 말을 ‘신부전증(腎不全症) 같은 존재’로 바꿔야 한다고 농담하셨다. 이제는 암의 예후가 신부전증에 못지않다는 인식에서이다. 그 후 치열한 연구와 교육으로 많은 훌륭한 제자를 배출했다. 대외적으로는 명의를 지도하는 교수님으로 종양학 분야의 정신적인 지주였다.   

선생님은 특히 교육에 열중하셨다. 학생이나 전공의가 의학전체를 폭넓고 유연하게 공부하고 바라보는 태도를 강조하셨다. 한편으로는 교수들에게 교육을 강조하고 교육능력을 향상하도록 독려하셨다. 선생님은 높은 학식과 덕망으로 후배에게 존경을 받으며, 보직자로서 리더십을 발휘할 기회가 많았지만 교육연구부장과 내과 주임교수직을 제외하고는 거리를 멀리하셨다. 그러나 의료계의 대표로 대한내과학회 이사장, 암학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셨고 대통령주치의로도 국가에 공헌하셨다. 

생전의 고 김노경 명예교수.

어떻게 보면 제자들에게 상당히 엄격하셨다. 천성에 맞지 않은지 회식이나 음주는 삼갔다. 한번은 전임의가 결혼하여 신혼여행 후 인사 차 집 앞에 갔는데도 만나주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러나 제자들은 선생님을 가장 존경하고 있다. 아마도 선생님의 완벽한 생활에서 만들어진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 때문이 아닐까. 니체의 말이다. “싫어하는 일을 거절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다.” 선생님은 70세에 의료계에서 은퇴하시면서, 자유로운 시간에 그 동안 소홀히 했던 인간 공부를 더 해볼 계획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  

선생님의 유일한 약점을 담배를 끊지 못하시는 것이었다. 왠지 우리들은 선생님에게는 끽연까지도 무해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안타깝게도 이것이 간접원인이 되어서 돌아가셨다. 선생님이 아유회에서 즐겨 부르던 노래는 어효선 선생님의 동시 <푸른마음 하얀마음>이었다.  

선생님은 진정코 이런 마음을 가지고 평생을 사신 완벽한 스승이셨다.  

삼가 우리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푸른마음 하얀마음>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 거에요
산도 들도 나무도 파란 잎으로
파랗게 파랗게 덮힌 속에서
파란 하늘보고 자라니까요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겨울엔 겨울엔 하얄 거에요
산도 들도 지붕도 하얀 눈으로
하얗게 하얗게 덮힌 속에서
깨끗한 마음으로 자라니까요 


서울대병원 핵의학과 교수 정준기 호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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