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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 고추밭에서
옥상, 고추밭에서
  • 의사신문
  • 승인 2017.06.05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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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風書風 〈63〉

점심시간이면 병원의 7층 옥상은 항상 직원들로 붐빈다. 커피 한 잔의 여유가 묻어나는 나무 벤치, 옥상은 꽃과 관목이 어우러진 사방이 확 트인 휴식 공간이다. 동쪽으로는 포항 시가지 건물 너머로 호미곶 수평선이 보이고, 좌우로 울창한 탑산과 양학산의 줄기에 둘러싸여 있어 바쁜 일과 중에도 직원들 누구나가 잠시 앉았다 갈 수 있는 편안한 쉼터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어린 공익 요원과 젊은 직원이 대부분이라, 이 시간에 올라오기가 괜스레 쑥스럽고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결국 어쩌다 한 번씩 진료 중 한가한 시간을 택하곤 한다.

5월 초부터 덥더니 날이 갈수록 더위가 예사롭지가 않다. 폭염으로 얼룩진 지난해 여름의 섬뜩한 기억을 지울 수가 없다. 병원 앞마당의 히말라야시다 그늘을 서성이다가 오랜만에 시원한 바람이 있는 옥상을 찾았다. 한 달 전과는 달리 조금 색다른 변화가 있었다. 여름이면 줄곧 사철채송화(松葉菊)가 피었던 중심 화단이 텃밭으로 바뀌고, 누군가가 그곳에 고추 모종을 심어 놓았다. 담당 직원에게 물으니 올해는 관상용 원예식물 대신 식용작물로 대체해 보고, 내년에는 옥상 가장자리의 화단도 그리할 계획이라고 한다.

내가 보기엔 환자와 직원들의 휴식 공간에 꽃식물의 아름다운 미관이 정서적으로 우선이지만 병원 관리부의 생각은 나와는 사뭇 다른 듯하다. 하기야 도시농업(Urban Agriculture)이 요즈음의 추세이다 보니, 공기관의 입장에서는 옥상의 용도와 활용을 바꿔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상부의 지시일 수도 있지만). 옥상에서 채송화와 넝쿨장미가 밀려나는 것도 시대적 흐름이랄까, 그렇지만 이런 한 평 남짓의 작고 사소한 변화조차도 왠지 마음 한 곳이 텅 빈 것처럼 허전하고 서운한 느낌을 감출 수 없다.

1제곱미터(㎡)의 공간을 땅으로 환원시켜 농작물을 키우게 되면 연간 20킬로그램(㎏)의 수확이 가능해진다. 게다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꾸준히 필요로 하는 잎과 채소 등은 씨 뿌리기에서 수확까지의 60일이면 충분하다. 도시농업은 힘겹게 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가난한 도시 사람들에게 활력을 주고 경제적으로도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삭막한 도시의 빈 공간과 자투리땅을 이용하면 생산성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활용 가치가 높은 건 사실이다.

인구증가와 식량난으로 아프리카의 빈곤국 서민(나이지리아, 라고스)들이 시작한 도시농업을 선진국에서 업그레이드하고, 지금은 식량이 남아도는 우리의 삶에서도 도시의 건물 옥상을 위주로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따지고 본다면 원예 식물이나 농작물이나 모두가 초록의 생명이 아닌가. 꽃식물의 정서적 휴식과 작물의 생산적 개념은 관점의 차이일 뿐이다. 도시농업을 기술적 디자인으로 적절히 설계하면 일석이조의 또 다른 정원 문화로 자리매김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다른 곳에 있었다. 자원봉사자들이 고추 모종을 채송화 심듯이 평평한 땅에 지나칠 정도로 촘촘히 심어 놓았기 때문이다. 꽃씨를 뿌리고, 꽃모종을 심으며 그것을 재배하고 가꾸는 것과, 농작물의 일종인 고추밭을 만들고 일구는 작업은 시작부터 전혀 다른 방식이다. 아무리 미관을 고려한다고 해도 농작물은 전적으로 식용을 위한 경작과 수확을 목적으로 한다. 특히 고추밭은 모종의 간격이 적당해야 하고, 풍성한 작황을 이루려면 퇴비의 양을 다른 작물보다 두 배 이상은 흙과 섞어 주어야만 한다. 이랑을 만들고 수분의 증발과 잡초의 번식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검은 비닐로 가리는 작업이 기본적이며 필수적이다.

모종을 심은 지 한 달이 지났으니 이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게다가 난간 옆 방울토마토의 지지대도 이상하다. 방울토마토 모종의 알루미늄 지지대 외에는, 곧 이어 무성하게 뻗어갈 줄기를 받쳐주는 버팀목 사이의 연결 테이프나 철망도 없다. 이미 심어온 지가 벌써 3년이 되었지만 아직 처음의 방식 그대로임이 참으로 한심하다. 밭을 만들고 재배하는 방식은 작물의 특성에 따라 다르다. 아무런 지식과 경험이 없는 공익요원과 자원봉사자들이 벌려 놓은 일, 한두 달 후에는 알게 되겠지만 결과는 보나마나다.

주위의 동료 선후배들이나 병원의 간부들도 대부분 농작물 경작이나 재배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이미 도시화 되어버린 사람들에게 텃밭 얘기를 하면 무엇 하랴. 이해조차를 못한다. 4∼50대 중년의 사람들이 이러하니 젊은이들이야 오죽 하겠는가. 농사 얘기를 하면 할 짓 없는 은퇴 후의 퇴물 늙은이 취급을 하니 그저 그들의 눈에 비치는 농작물 재배는 신기한 구경거리일 뿐이다.

10년 전 소년원 공직에 있을 때, 직장 울타리 밖의 30여 평 빈 땅을 홀로 텃밭으로 개간하여 상추와 고추, 들깨와 배추, 무와 고구마까지 여러 가지 작물을 재배한 적이 있다. 시골 출신의 기능직 직원들의 도움과 조언이 있었지만 그래도 제대로 수확을 이루는 데 꼬박 2년이 걸렸다. 무와 배추 모종을 심는 한여름에는 모기에 물리고 안면홍조증이 생길 정도로 힘겨웠지만, 나름의 농사짓는 재미도 쏠쏠하여 텃밭 일은 은퇴할 때까지 계속하였다. 지난 일이지만 아직 미련이 남았는지 출퇴근의 아침, 저녁이면 용흥동 언덕길의 텃밭을 예사롭게 지나지 못한다.

도시인들이 전체 인구의 50%를 넘어섰고, 고령화된 농촌 인구가 급속히 줄어들고 있다. 아무리 진보된 세상이라도 먹을거리의 생산은 더 이상 시골의 농촌에만 의지할 수 없고, 수입 농산물로의 충족은 미래를 불안하게 한다. 이제는 선진국에서 조차 도시농업이라는 담론이 당면한 현실이 되고 있다. 기술적 향상은 채소 재배를 단순히 옥상이나 자투리땅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도심의 빌딩 내에서 재배하여 공급하는 공장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도시농업은 작물 재배뿐만 아니라 공중정원도 포함한다. 옥상을 작물화 할 것인가, 아니면 정원화 할 것인가는 건물의 특성과 내부인들의 요구를 반영하여 결정할 일이다. 이왕 시작한다면 경험자들의 자발적 참여가 필요하다. 지식의 공유는 독서와 인터넷, 소셜 네트워크의 소통으로 가능하지만, 직접적인 체험과 경험이라는 나눔의 참여 없이는 성공을 거두기가 어렵다.

6월의 여름 햇볕이 따갑게 내려쬐는 병원 옥상의 고추밭, 그래도 옛 모습을 잊지 못하는 걸까. 붉은 윤기가 흐르는 듯 햇살에 반짝이는 사철채송화 꽃잎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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