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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의 이름으로
도덕의 이름으로
  • 의사신문
  • 승인 2016.12.26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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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風書風 〈60〉

진화학자 도킨스의 말처럼 우리가 신에 의해 고귀한 목적으로 창조(지적설계론)되지 않았다면, 우리가 오직 이기적 유전자의 산물이라면 과연 무엇이 우리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부도덕한 이기주의자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자연선택의 과정은 무신론적이고 무도덕적이지만, 그 과정으로부터 인간은 뛰어난 지능과 함께 스스로의 이기적인 부도덕성을 제어하기 위한 정교한 도덕관념을 갖춘 사회적 동물로 진화했다. 호모 사피엔스의 문제는 우리의 도덕관념이 너무 적다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많은 도덕관념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는 지켜야할 도덕으로 넘쳐난다.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예절과 염치, 공중 규칙과 규범, 직장생활의 내규와 인간관계, 법과 관련된 규제 사항과 그렇지 않은 것까지…, 아침에 일어나서 취침할 때까지 하루 종일 수많은 도덕에 둘러싸여 매사를 조심하고 공중윤리에 어긋나지 않도록 노심초사한다. 또한 타인이나 소속된 집단과도 전혀 관계가 없는 개인의 종교적 계율이나 샤머니즘적 습성조차도 자신의 행동을 제약하는 도덕적 규율에 해당된다. 그야말로 우리는 지켜야할 도덕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사회적 집단의 일인으로서의 윤리적, 양심적 제약에 의해 하루를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도덕이란 사회의 구성원들이 개인의 양심, 사회적 여론, 문화와 풍속에 의거하여 스스로 마땅히 지켜야 할 행동 준칙이나 규범의 총체이다. 그리고 도덕은 외적 강제력을 갖는 법률과 달리 각자의 내면적 원리로서 작용하며 인간 상호 관계를 규정한다. 도덕은 행위의 동기와 양심의 자율성을 중시하며 이를 위반할 때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사회적 비난을 받게 된다. 이에 반해 법규범은 행위의 결과를 중시하고 강제적인 처벌을 가하게 된다. 법 역시 근본 바탕을 도덕에 두고 있으며 반드시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덕이다.

`비도덕적(non-moral)이다.'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무도덕(amoral)과 부도덕(immoral)의 개념이 그것이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이 둘을 비슷한 개념으로 통칭하여 비도덕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보다 엄밀히 구분하자면 전자는 도덕관념이 없음을 의미하고 후자는 도덕에 어긋남을 말한다. 길거리에서 개가 용변을 보면 이는 무도덕이고 사람이 그러한 행위를 하면 부도덕이 된다. 그러므로 amoral의 무도덕한 행위는 도덕관념 자체가 없는 짐승과 같다는 의미로 어찌 보면 immoral의 부도덕보다 훨씬 심한 비난에 해당한다.

`도덕이 무너지는 사회, 우리 사회는 점점 도덕심이 사라지고 있다.'는 말을 주위 사람들에게서 종종 듣곤 한다. 내가 어릴 적에는 웃어른들이 그리 말씀하셨고, 지금은 나와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하곤 한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사회를 바라보는 이러한 도덕적 시각은 대부분 신구(新舊) 세대의 문화적 차이에 기인한다. 

오늘날의 도덕적 관념은 과거 공동체 사회를 지배했던 시대와는 분명히 다르다. 인권과 자유, 평등에 기반하는 다양성, 그리고 4차 산업혁명으로 발전하는 기술 문화적 가치관은 도덕을 더욱 복잡하고 상대화하는 경향이지만, 그 이면에는 자기기만의 주관적 포스트모더니즘적 성격까지 내포하고 있다.

도덕률과 도덕적 통념은 가변적이며 시대적 흐름을 반영하는 역사성을 지닌다. 도덕이 없다는 주변인들의 비난적 표현은 사회의 정신적, 물질적 변화에 따른 도덕률의 적용과 도덕이 작용하는 방식이 과거와는 다름을 간과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윤리학에서는 이것을 시대적 변천에 따른 도덕의 `비도덕화 과정'의 결과라고 한다. 

도덕은 전통적 문화와 풍속에 고착된 경험적 보수주의와 시대적 환경과 관념의 변화에 가치적 중심을 두는 진보주의를 구분하는 이념적 잣대이기도 하다. 도덕적 비판의 문제는, 보수적 비판자들이 과거의 도덕적 경험을 기준으로 현재를 평가하는 반면에, 진보적 비판자들은 불안정한 오늘의 잣대로 과거를 비난하는 퇴행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에는 시대와 역사를 아우르는 비도덕화 할 수 없는 것들(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 개인적 이기심의 절제와 공동체적 질서에 관한 기본적 도덕관)이 있으며 도덕률의 보편적 기준이 자리한다. 

세상은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20세기 중반에 시작된 과학 기술과 정보화의 혁명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우리 사회를 바꾸어 놓았다. 미래학자들은 로봇이나 인공지능(AI)을 통해 실재와 가상현실을 통합하고 사물을 자동적, 지능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을 거론하고 있다. 인공지능 `IBM 왓슨(Watson)'으로 진화하는 미래 의학의 다음 세대에는 어떤 도덕과 도덕적 질서로 사회를 유지할지 사뭇 궁금해지기도 한다. 

문명비판가 아놀드 토인비는 `현대문명의 위기는 기술문명이 토끼처럼 달려가는 데 비해 정신문명은 거북이처럼 뒤쫓는 데 있다.'고 했다. 도덕도 마찬가지다. 도덕의 위기 역시 현대문명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사회 철학과 인문학에서 비롯하며, 비도덕화 과정에서 마주치는 현대 문명사회의 불안정한 현실과 불확실한 미래 때문이다. 

불과 4∼50년 전에는 불임수술이나 피임이 인구증가를 우려하는 사회 도덕적 정책이었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출산하지 않는 부부, 결혼하지 않는 청년층으로 인해 인구감소가 작금의 한국 사회가 당면한 골치 아픈 현안이 되어 버렸다. 법적으로 사라진 간통죄와 같은, 이러한 시대적 도덕률의 급격한 변천은 가까운 시대의 역사를 살아온 구세대의 사람들에게는 가히 충격적인 변화라고 할 만하다.

한 세기가 지나기도 전에 눈부시게 발달한 기술문명은 전통적 문화풍속과 인간관계뿐 아니라 사회적 구조와 질서까지, 현대인의 삶과 삶의 형태 모두를 바꾸었다. 인권, 자유, 평등, gender role, 동성애, 동물보호, 자연환경 등에 대한 수만 가지의 새로운 도덕과 규범, 법조문들은 변화에 민감한 신세대조차도 그런 사회적 변화의 속도에 적응이 어려울 정도이다. 
또한 세계화된 문명사회는, 지역적 환경과 문화의 장벽을 허무는 이동수단의 발전과 통신매체의 신속함으로 지구촌 전체의 도덕적 질서를 일반화, 보편화하고 있다.

과거의 봉건시대나 독재체제에는 도덕이 오로지 상류 지도층의 것이고 그들을 위해 존재했지만, 오늘의 민주주의 사회는 국민 다수를 위한, 다수에 의한, 다수의 보편적인 도덕률을 형성한다. 그렇지만 이는 소수 집단이나 소외된 계층을 보호하기에는 한계가 있으며, 일부 권력층과 이기적 집단의 도덕적 일탈(逸脫)은 자기기만의 폭력성마저 배태(胚胎)하고 있다. 
선동적인 포퓰리즘 정치, 정치권력과 경제적 이권만을 챙기려는 조삼모사(朝三暮四)의 위선적인 부도덕성 앞에서, 대의민주주의는 역사를 거스르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국회의원 누군가가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고 했다. 국민이라면 도대체 어떤 국민인가? 국민의 4대 의무를 행하지 않는 자, 국가 이익을 도외시하고 자신들의 탐욕만 채우려는 이기적인 집단, 정치적 선동만 일삼는 정당 정치인과 이념적 시민단체 등 오직 권리만 주장하고 권력지향의 부도덕한 집단의 사람들도 국민인가? 비도덕적인 자들의 오만과 폭력이 거리를 슬로건처럼 장식하는 민주주의와 포퓰리즘적 국민의 범주나 정의는 무엇인가? 나는 그들이 말하는 국민이 아니라 이 나라 권력의 주인인 국민이 진정 누구인가를 묻고 싶다.

작금의 우리 사회는 대통령의 도덕성이 도마 위에 올라있고, 국정공백의 혼란한 양상이 지속되면서 위기는 극한적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북한을 비롯한 시대착오적인 독재국가들에서 행해지는 권력의 amoral이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고 있지만,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정부 지도층과 국회 권력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폭넓게 자리하는 immoral의 도덕불감증과 도덕적 해이는 그 뿌리가 깊고 그로 인한 민생의 피폐함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최순실 게이트는 오래전부터 권력 내부에 잠재해왔지만,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청와대 내부와 조선일보 주필의 부도덕성이 서로 대립하고 있는 가운데 불거져 나왔다. 언론은 간소한 자아비판적 행위로 자신의 문제를 피해 갔지만, 청와대 권력은 새롭게 나타난 악재로 치명적 손상을 입었다. 어찌 되었든 조선일보가 이겼다. 하지만 위선적인 언론의 행태 역시 도덕적인 면에서 전혀 자유로울 수가 없다. 

옐로우저널리즘(yellow journalism)의 창시자인 조지프 퓰리처조차도 신문은 옳고 그른 것을 가르치는 `도덕 교사'라고 믿었다. 이번의 최순실 사태에서 보여주는 언론과 방송의 보도경쟁은, 태반주사나 성형 시술, 미용이나 식사 습관과 같은 개인의 사생활을 가감 없이 공개하고,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는 선정주의적 편향성과 추측성 왜곡은 도를 지나쳐 스스로의 도덕적 명분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언론이 진실로 도덕의 수호자임을 자처한다면 팩트를 바르고 공정하게 보도하고 현실을 냉철하게 비판하며 미래적 혜안을 제시해야 한다. 또한 언론이 사회 구성원 전체를 위한 공기(公器)임을 자각한다면 조직의 정화와 시스템의 개선을 통해 독자들에게 자중자숙(自重自肅)함의 미덕을 보이는 게 마땅하지 않겠는가.

돌이켜보면 87년 체제 이후로 최상위 권력층의 부도덕은 끊임없이 반복되었고 우리 사회는 점점 도덕적 허무주의의 늪으로 함몰하고 있다. 깨어있는 시민의식은, 대통령의 공직을 맡은 자가 자신의 부도덕함으로 인해 공직을 수행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면 자리에서 물러남은 당연한 도덕적 행위이고 비리가 있는 부분은 반드시 법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촛불시위를 지켜보고 있는 대다수 말없는 시민들은 강성 이익단체의 합세와 이념적 폭력을 우려하고 대통령의 부도덕과 상관없는 정책은 다음의 선거까지 지속가능하기를 바란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선거란, 선출자의 도덕성과 인물됨뿐만 아니라 정강정책도 유권자가 평가하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가 존재하는 한 도덕과 도덕의 논쟁 역시 존속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도덕화에는 조심해야할 점이 많다. 도덕성을 신분이나 순수함과 혼동하는 것, 지나치게 도덕적인 차원에서 판단을 하고 그에 따라 반대자들에게 공격을 허락하는 것, 불가피한 타협조차도 금기시 하는 것, 어디에나 존재하는 자기기만의 악덕이 그렇다. 자코뱅당의 로베스피에르나 독일민족주의를 내세운 히틀러도 온갖 이유로 자신의 대의가 정당하다고 확신했던 도덕주의자였으며, 실천적 혁명가 레닌 역시 도덕적 사회주의자였다.

버트런드 러셀은 `서양 철학사'에서 이렇게 썼다. `훌륭한 양심을 가지고 잔인한 고통을 가하는 것은 도덕가의 기쁨이다. 그들은 도덕의 이름으로 지옥을 만들어 갔다.' 프랑스 혁명과 나치즘, 러시아 혁명, 조선 중기의 예송 논쟁을 보라, 지나친 도덕적 맹신주의가 권력과 결합할 때 그 폭력의 결과가 어떠했는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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