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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일상이 `행복의 다른 이름'으로 다가와
평범한 일상이 `행복의 다른 이름'으로 다가와
  • 의사신문
  • 승인 2016.12.05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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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의학문인회 독후감 공모전 수상작 〈1〉 : 대상 - 되르테 쉬퍼의 `내 생의 마지막 저녁 식사'를 읽고
이하린 아름다운 피부과의원장

지나간 여름은 유난히 길었다. 

“이틀만 더 남국의 햇살을 주시어 익어가는 과일에 마지막 단맛이 들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던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구절에 쉽게 동의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아침저녁 바람결에 묻어오는 가을을 느끼며 자연의 섭리에 다시금 숙연해진다.

지난 주말 잠시 서점에 들렀다가 나는 한 귀퉁이에 진열된 낯선 책 앞에서 문득 멈추어 섰다.

〈내 생애의 마지막 저녁식사〉 `마지막'이라는 말이 그만큼 자극적 이어서 그랬을까? 더 이상은 기회가 없고 그것으로 끝이라는 뜻, `마지막'이라는 말. 그것은 지극한 간절함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 간절함은 `저녁식사'라는 평범한 단어와 이상한 조화를 이루며 내 시선을 끌어당겼다. 나는 책을 집어 들었다. 이 책은 실화를 바탕으로 편집되었으며 되르테 쉬퍼에 의해 독일 ARD 방송국에서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에리히-클라우데' 상을 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독일 시내 최고급 레스토랑의 요리사인 루프레히트는 최고의 실력을 인정받는 수석요리사였다. “훤칠하고 탄탄한 몸매, 짧은 곱슬머리, 서글서글한 눈”, 그는 언뜻 보아도 전문가임을 알아챌 수 있을 만한 자신감 있는 외모와 매너, 훌륭한 요리 실력을 모두 갖춘 사람이었다. 그는 쉬지 않고 인생을 달려와 바라던 것을 성취하고 원하던 것을 드디어 누렸지만 그의 내면은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돈이나 명성에 연연하지 않고, 보다 충실한 삶의 가치로 긍지와 보람을 느끼고 싶어 갈망하던 그는 호스피스 병원인 `로이히트 포이어'에서 일하게 되면서부터 마음의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호스피스 병원에서 죽음을 눈앞에 둔 환자들에게 원하는 음식을 각각 주문 받아 마치 예술가가 작품을 완성하듯 온 정성을 다해 음식을 만든다. 그러나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먹고 싶은 음식을 겨우 생각해 낸 환자가 극심한 통증 때문에 한두 숟갈밖에 삼키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고, 다음 주에 원하는 요리를 만들어 주기로 약속하고 월요일에 일찍 출근해 보면 그 사람은 주말동안 세상을 떠난 뒤였던 일도 많았다. 그가 온 마음으로 집중했던 일은 환자들에게 잃어버린 미각의 즐거움을 되찾아주는 일이었다.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먹기를 포기한 환자, 죽음이 임박했다고 절망한 나머지 세상과의 소통을 완전히 차단해 버리고 혼자만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환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죽음 앞둔 환자 위한 `요리'가 삶의 의미 찾는 `예식' 승화
쫓기며 달려온 인생을 돌아보며 일상의 소중함 깨닫게 돼

그들은 아무리 맛있는 음식의 이름을 상기시켜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요리사가 정성을 기울여 조리한 음식을 들고 가서 권유해도 무심하고 시큰둥하게 대했다. 특히 호스피스병동에 갓 입주한 환자일수록, “무슨 수작이지? 배후에는 무슨 꿍꿍이속이 있겠지.” 하며 친절을 무시하고 의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가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진심이 통하고 영혼의 교류가 이루어지듯이 조금씩 식욕을 회복하는 환자들이 생기면 루프레히트는 행복과 보람으로 날아갈 듯한 마음이 되기도 했다. 

환자들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미슐렌 스타의 최고급 요리가 아니라, 어린 시절 어머니나 할머니가 만들어 주셨던 평범한 음식이었고 그것은 곧 소박하고 단란했던 시절의 정겨운 추억이기도 했다. 또한 이제는 그리움이 된 한 토막의 짧은 이야기, 미처 표현하지 못한 가족에 대한 애정이었으며 죽음 앞에서 마지막으로 나누고 싶은 이별의 대화였다. 그는 또한 머지않아 떠나게 될 세상과 헤어지게 될 가족을 위하여, 그리고 사랑을 잃고 남아 있게 될 그들의 슬픔을 위하여 음식을 준비했다. 환자들에게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단순한 일상의 일부분이나 말초적 감각의 만족이 아니라 정신없이 달려온 인생길에서 잊혀진 `삶의 의미'를 찾는 일이었고, 자기 존재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는 일종의 거룩한 예식과도 같았다.

루프레히트가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줌으로서, 지나간 인생의 행복했던 순간들을 환자들이 추억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일련의 과정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우리가 환자에게 할 수 있는 어떠한 예식이나 기념보다 소박하지만 거룩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요리사 루프레히트는 환자에게 음식 주문을 받으러 갈 때, 몸과 마음이 힘든 그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 침대 옆에 무릎을 꿇는 자세로 앉아 주문을 받고는 했다. 자신의 몸을 낮추어 경청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열기 위해 먼저 다가가 무릎을 꿇는 모습에 나는 정말 감동을 받았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나는 내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환자들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었나? 나는 죽음과는 관계가 먼 미용 치료나 피부 질환 환자들을 진료하지만 가끔 그들이 치료받고자 하는 피부 문제 속에 꽁꽁 감추어진 마음의 상처를 발견하곤 한다. 그리고 몸의 문제 뿐 아니라 영혼의 치유가 함께 되기를 기도하지만 때로는 바쁘고 힘들다는 이유로 그 상황에 충실하지 못하거나 외면할 때가 많다. 며칠 전, 환자 S가 갑자기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면서 수척한 모습으로 진료실을 찾아왔었다. 그녀는 피부 질환의 약 처방을 받기 위해서 왔지만 그보다는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찾아 왔을 것이다. S의 하소연을 들으면서 나는 아토피로 고생하는 그의 어린 딸이 생각나서 가슴이 에이는 것처럼 아팠지만 정작 위로가 될 만한 어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음식이 나에게 주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평소 식성이 좋은 편이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나는 식사 자체를 즐기거나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살았었다. 시간이 빠듯한 토요일에는 진료 중에 5∼10분 정도 짬을 내어 김밥 몇 조각으로 대강 때우기도 하고, 혼자 밥 먹는 시간이 많다 보니 책을 보거나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식사에 집중하지 않고 소홀하게 보낼 때도 많았다.

생각해보면 식사만 소홀히 여긴 것이 아니라 인생이 마치 영원할 것처럼 쫓기면서 달리듯이 살고 있는 것이다. 죽음이란 삶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아닌데도 사소한 일에 분개하고 상처 받고 억울해 하면서 정작 중요한 것은 놓치고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언제가 죽음의 문턱 앞에 서게 되면, 이렇게 바쁘게 뛰어 다니고 웃고 환자를 보고 옷을 갈아입고 밥을 먹는, 너무나도 평범하고 사소한 일상들이 기적같이 느껴지고 눈물 나게 그리울 지도 모른다. 

오늘 내가 “지겹다”고 생각하는 반복되는 이 평범한 일상이 사실은 행복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명심해야겠다. 언젠가, 내 인생의 마지막 저녁 식사 시간이 온다면 나는 어떤 음식을 주문하게 될까? 탁자 위에 놓인 따뜻한 커피의 내음이 갑자기 눈물겹도록 향기롭다. 나는 어쩌면 지금 살아 있음의 축복을 마시고 있는 것이다. 최초인 듯이 마지막인 듯이.

■<요약> 내 생의 마지막 저녁 식사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모인 호스피스에서 매일 매일 사람들이 원하는 요리를 일일이 주문 받아 만들어주었던 요리사 루프레히트 슈미트의 감동적인 이야기이다.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인정받는 수석 요리사였지만 채워지지 않는 인생의 허기를 달래기 위해 호스피스 사람들을 위해 요리했던 그의 이야기는 2009년 ARD 방송국의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독일의 가장 유명한 언론인상을 받기도 했다. 

매일 아침 병실을 돌며 먹고 싶은 음식을 물어보고, 그 음식에 깃든 추억까지 선물하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주는 한 요리사의 이야기를 통해 살아가는 동안 놓쳐서는 안되는 것들을 돌아보게 한다. 〈웅진지식하우스 간/280쪽/값 1만2000원/2010년 11월 출간〉

■ 글/싣/는/순/서

 1. 대상 : 내 생의 마지막 저녁 식사(되르테 쉬퍼) - 이하린(아름다운 피부과)
 2. 최우수상 : 페스트(까뮈) - 최주현(서울밝은세상 안과)
 3. 우수상 : 참 괜찮은 죽음(헨리마시) - 변세진(세브란스병원 류마티스내과)
 4. 우수상 : 바람이 되고 싶었던 아이(로렌차 젠틸레)
                - 김정일(김정일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5. 장려상 : 소송(프란츠 카프카) - 정재호(프로필 성형외과의원)
 6. 장려상 : 무의미의 축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밀란 쿤데라)
                - 정인순(인천기독의원)
 7. 장려상 : 소금(박범신) - 서향근(한마음요양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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