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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바이처 고향 방문기 
슈바이처 고향 방문기 
  • 의사신문
  • 승인 2016.07.11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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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기의 마로니에 단상 〈42〉

내 평생에 가보고 싶은 곳이 한군데 있다. 일반 지도에 나오지도 않는 작은 마을이다. 독일 접경인 프랑스 알자스 지방에 있는 균스바흐! 알버트 슈바이처의 고향이다. 철학자, 신학 교수,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이자 50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의료봉사에 투신한 그 슈바이처 박사이다.

그는 젊어서 내 인생의 가이드이자 의사의 길에서 나를 이끈 견인차였다. 문과적 성향이었던 나는 대학입시에서 아버지의 권유로 의과대학으로 방향을 정하는데 이광수 선생의 〈사랑〉 소설이 큰 영향을 주었다. 춘원은 의사인 장기려 선생을 모델로 집필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슈바이처 박사도 참조하지 않았을까? 소설 속 주인공 안빈 박사는 유명한 시인이었으나 뜻한 바 있어 의사가 되어 의료봉사에 연구도 하고 나중에 결핵요양 병원을 세운다. 인문학 분야에서 성공한 학자가 의사가 되어 타인에게 봉사하는 소설의 플롯이 슈바이처 일생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나는 의학을 공부하면서도 슈바이처 박사와 장기려 선생을 항상 귀감으로 여겼다. 공부가 힘들 때는 훌륭한 이 두 분이 나보다 열악한 환경에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되새겼다. 특히 이들처럼 의학과 함께 인문학 공부로 균형 잡힌 인성을 갖추려고 조금은 관심을 가졌다.

이번 방문은 독일에서 음악대학 교수로 있는 이옥희 선생의 호의로 이루어졌다. 내 소망을 잘 알고 있는 이 선생은 내가 독일에 온 기회에 여정을 준비한 것이다.

프랑크푸르트에서 고속도로로 2시간 가면 프라이부르크에 도달하고 국경을 넘어 프랑스로 가서 콜만과 쿤스더를 지나 균스바흐에 도착했다. 독일에 와서 시차는 극복했지만 전날 밤잠을 설친 나는 자동차가 시속 200km로 달리는 독일 고속도로에서 계속 졸면서 갔다.

처음 오지만 사진과 책자에서 보고 읽어서 인지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제법 높은 산들이 줄을 이어 연결돼 있고 그 아래 포도밭이 즐비하다. 신선한 풀 냄새가 유난히도 짙어 달리는 차 속에서도 향기롭다.

이곳에서 슈바이처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자연 속에서 자라면서 느낀 생각을 키워 나중에 성인이 되어 큰 열매로 맺는다. 한번은 친구와 씨름을 해서 이긴 적이 있다. 땅에 넘어진 그 아이가 일어나면서 “나도 너희 집처럼 고기를 먹으면 이길 수 있어” 라고 하자 그는 심한 미안함을 느낀다. 또 한번은 친구의 강요에 의해 겁쟁이가 아닌 것을 보여주기 위해 같이 새를 잡으러 간다. 새총을 쏘려는 순간 마침 교회 종소리가 울리고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소리로 들리자 용기를 내어 혼자 집으로 돌아간다.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생각한다. “어디가 새총을 집어 던지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달려간 숲 속일까?” 젊어서 책으로만 읽던 고장에 실제로 온 것이다.

천성적으로 불우한 이웃에 관심을 갖고 미안해 하던 그는 어른이 되고 교수가 되어서도 여전하였다. 아니 더 적극적으로 느낀 바를 행동에 옮긴다.

어려서부터 자신의 좋은 환경과 성공을 타인에게 갚아야 한다는 예민한 윤리관을 가진 그는 20대 초반에 중요한 결정을 한다. 30세까지만 자기 일을 계속하고 그 이후는 타인을 위해 살겠다는 것이다. 이십 대 젊은 나이에 한참 철학과 음악으로 인생의 꽃이 피어 인정을 받고 있을 무렵 우연히 아니 필연적으로 아프리카 선교단체에서 봉사하는 의사가 필요하다는 팸플릿을 읽게 된다. 그는 조용히 책자를 덮고 이 일이 하느님의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목사의 아들이었던 그는 여덟 살에 교회에서 파이프오르간 연주를 시작하였다.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여 28세에 대학에서 철학강의를 맡고 바흐에 대한 책자도 발간한다.

그러나 자신과의 약속대로 30세에 의과대학에 들어가 7년 후 의사가 된다. 그는 치밀하게 준비해 1913년 마침내 아프리카 가봉 람바레네에 병원을 세워 봉사활동을 실현한다. 4년 동안 첫 의료봉사 후 평생 동안 일년에서 10년까지 14번을 아프리카에 거주하면서 환자를 돌보고 병원을 운영하였다.

한편 바흐 파이프오르간 곡의 전문 연주자로 활동하고 초창기 기독교 신앙에 대한 연구도 꾸준히 진행하였다. 마침내 생명경외 철학을 제시하고 이차 세계대전 후에는 반핵운동을 시작하였다. 많은 희생을 치른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인류가 정신적 황폐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그의 휴머니즘에 바탕을 둔 의료봉사는 세계의 주목을 받았고 생명경외 사상을 가르치는 근시대의 성자로 존경 받아 노벨 평화상도 받았다. 1965년 90세로 자신이 세운 람바레네 병원에서 타계한 그는 히포크라테스 다음으로 의사의 윤리적 표상이 되었다.

우리 말에 “세 살 버릇이 여든 간다.”는 속담이 있다. 이 경우처럼 좋은 의미에서도 해당된다. 뛰어난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경험한 모든 것을 세상살이에 빠짐없이 이용하는 것이다. 어려서 느끼고 생각한 것이 나중에 결실로 나타난다.

한편 슈바이처 박사는 의지가 굳고 자기관리가 철저한 사람이었다. 모든 주위 사람이 반대하는 상황에서도 초심을 관철해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아프리카에서 의료봉사를 한다. 혀를 내두르는 것은 이 힘겨운 과정에서도 철학교수와 연주자로서 꾸준히 정진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요즘 좋지 않은 풍문에 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소문은 가족들의 욕심으로 분규가 있어서 아프리카 병원이 폐쇄되었단다. 박사의 숭고한 봉사도 현세대의 관점으로는 치기 어린 행동으로 평가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실상 파이프오르간 연주는 구식으로 수준은 그리 높지 않았고, 그의 생명철학은 너무 평범하다고 한다. 또한 박사는 식민주의자로 원주민을 차별대우했다는 것이다. 나는 간간히 들리는 이런 소리가 불편하지만 슈바이처 식의 자기 희생적인 의료봉사가 계산이 앞서는 현대 시대에서는 잘 맞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고향에 세운 기념관은 박사가 받은 괴테상의 상금으로 구입하여 살던 고향 집을 사후에 따님이 기증하였다.

나중에 수상한 거액의 노벨상금은 람바레네에 두 번째 병동을 만드는데 사용하였다. 기념관을 매년 4000명 정도가 방문한다는데 일본인은 다소 있어도 한국사람은 아주 드물단다. 사실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 오기가 쉽지 않겠다. 다시 한 번 이옥희 선생님께 감사 드린다. 마침 독일관람객이 단체로 와서 같이 설명을 들었다.

집안 친척으로 교사, 교수와 목사들이 많았다. 지적으로 우수한 혈통으로 철학자 사르뜨르가 조카이다. 여기에 부모님 모두 장수하고 그도 90세까지 살아 유전자가 형성되는 복합과정 중에 슈퍼 유전자를 갖고 나온 것이다.

이런 바탕에 건전한 윤리관이 설정되고 본인의 자각과 노력이 합세해 시너지 효과가 나타났다. 나는 슈바이처가 의학을 공부하고 의사로 활약하면서도 종교, 철학, 음악 활동을 같이 한 것이 더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한다. 한 분야에서 느낀 피로를 색다른 분야의 일로 오히려 해소하고 또 다시 활력을 주며 서로 증폭해 주었다.

그의 방은 이런 여러 가지를 병행하면서 필요한 온갖 서류, 문헌, 책자로 가득 찼다고 한다. 그만이 알 수 있게 주제별로 방바닥에 높이 쌓아 놓고 무너지지 않게 그 사이를 조심하며 걸어 다녀야 했다.

시간을 잘 쓰는 사람이 많은 일을 한다. 내 생각에는 시간을 잘 사용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집중하여 일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여러 일을 동시에 하는 것이다. 선천적으로 남자는 집중을 잘하고, 여자는 여러 가지를 잘한다.

한 예로 엄마는 아이를 돌보면서 한편 TV 연속극을 보고 동시에 양파를 다듬는다. 슈바이처는 이 둘에 다 능통해 상대적으로 시간을 많이 사용할 수 있었다.

나는 기념관을 구경하면서 “어떤 사람이 위인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후세 사람들이 따를 훌륭한 일을 하여 역사에 남을 인물일께다. 그러나 업적의 평가는 시대에 따라 가치관이 변하기 때문에 예전과 같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왕에 대한 충성으로 추앙을 받던 사육신을 지금은 다르게 평가할 수 밖에 없다. 결국 삶의 결과 보다는 삶의 태도에서 한 인간의 위대성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이런 점에서 슈바이처 박사는 위인임에 틀림없다. 그는 일생을 다른 사람보다 몇 배 열심히 살았다. 자신의 능력으로 얻은 보장된 교수직과 명예를 버리고 불우한 이웃에 보답해야 한다는 소신에 따라 어려운 선교의사의 길을 선택했다. 뒤늦게 의학공부를 시작해 험난한 현실에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공적으로 병원을 세워 운영하였다. 이와 같이 자기 스스로 윤리적 문제를 제시하고 스스로 대답하고 해결한 것이다. 진정으로 신에 가까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다.

풍문과는 달리 다행히도 알버트 슈바이처 재단은 람바레네 병원을 150병상에 연간 5만 명을 진료하는 현대식 병원으로 발전시켰고 또 다른 병원을 아이티 섬에 성공적으로 개원하였다. 그의 박애정신을 계승하는 슈바이처 펠로우십으로 젊은이들을 꾸준히 양성하고 정기적으로 심포지엄도 열고, 일 년에 두 번씩 책자도 발간하는 등 나름대로 활발하게 슈바이처의 사상과 업적을 연구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오고 싶어서인지 담쟁이로 덥힌 예스러운 건물이 눈에 익숙하였다. 입구에 걸린 슈바이처 박사의 대형 사진도 친근하고 거실에 전시된 가방, 침대, 책상, 의자, 오르간에서 박사의 체취가 느껴졌다. 어릴 때의 요람도 같이 전시 되어 있어서 더욱 뜻깊었다. 나는 이번 방문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란 생각이 들었다. 방문객들이 빠져 나간 뒤 혼자 남아 의자와 침대에 앉아보고 나에게는 보물 같은 유품들을 하나하나 만져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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