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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의 철골소심<11>
내 친구의 철골소심<11>
  • 의사신문
  • 승인 2009.11.04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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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무거운 마음으로 오랜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그가 근무하는 곳은 부여 어디쯤 조용한 시골 마을에 자리 잡고 있는 요양병원입니다. 오래 전에 문을 닫은 초등학교 건물을 개조한 곳입니다.

야트막한 언덕위에 남향으로 지어진 단층의 학교는 따뜻한 가을볕을 쬐며 졸고 있었습니다. 운동장에 들어서서 뒤돌아보니 시야가 시원합니다. 아직 베지 않은 벼가 여기 저기 많이 남아 있습니다. 꽤 오래 전에 문을 연 학교인 듯, 플라타너스나무와 은행나무가 우람하게 서서 운동장 가에 그늘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거동이 가능한 몇몇 환자들이 긴 작대기로 툭툭 은행을 털고 있습니다. 학교 뒤편으로는 키 높은 감나무에서 감들이 발갛게 익는 그런 곳입니다.

이 병원 의사로 일하고 있는 친구는 고등학교 입학하던 해에 만났습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하던 시절에 만났는데, 이제는 어떻게 살았는지를 이야기하는 나이입니다. 벌써 35년이나 되었습니다.

십일년째 침상에 누워 생활해 오고 있는 어머니를 이 친구에게 부탁하려고 합니다. 십년이 넘도록 수발을 하셨던 아버지께서 먼저 가시며 내게 어머니를 맡기셨는데 이 먼 곳으로 모셔 오려니 죄를 짓는 듯 가슴이 아려옵니다.

어려운 부탁을 하러 온 나를 보는 친구의 표정은 평온합니다. 그의 진료실은 단출했습니다. 진찰 침대와 소파, 작은 책장과 책상 그리고 그 위에 놓인 철골소심 한 분. 마주 앉아 철골소심을 핑계로 짐짓 딴청을 합니다.

저 난 품종은 철골소심이고, 가을에 작은 연녹색 꽃이 피는데 꽃의 모양새는 그리 볼품이 있지는 않아. 그렇지만 향은 그만이지. 중국 남부지방이 원산지인데 이 난은 잎만 보면 바로 알 수 있어. 잎이 좁고 윤이 나는데, V자 형태로 각이 져 있어서 좀 억센 느낌이 들거든. 이 난 볼 때마다 나는 ㄱ자 강철 빔이 생각나. 어렸을 때 어렵게, 어렵게 잘라 썰매 날 만들던… 그런데 이 난 꽃은 본 적 없지? 처음 올 때 말고.

어머니 걱정은 너무 많이 하지 마라. 여기 생각보다 괜찮아. 햇빛 좋고, 바람 깨끗하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 심성도 다들 좋아. 병실 한 번 돌아볼래?

그를 따라 나섰습니다. 한 때는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 선생님 칠판 두드리는 소리, 풍금 소리가 넘치던 교실은 이제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들 차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것을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볕뿐입니다. 그렇게 편안하고 조용하게 하루해가 지나고 있습니다.

그를 따라 다시 운동장으로 나섰습니다. 바람이 조금은 싸늘해 옷깃을 여몄습니다. 그런데도 가슴은 자꾸 서늘해집니다. 이번엔 이 친구가 딴청을 피웁니다.

그런데 말이야 그 난은 왜 꽃이 피지 않지? 햇볕을 못 봐서 그럴까? 밖에 내다 놓아볼까?

어머니께서 도통 식사를 하지 않아. 전엔 불편하지만 왼손으로 떠서 드셨는데 벌써 석 달째 먹여드려야 억지로 우유 한 잔정도… 아 참, 모시고 내려오기 전에 전동침대하고 필요한 것 몇 가지는 동생이 싣고 올 거야. 다시 조립해서 넣어야 하니까 좀 도와줘.

진료실 안의 철골소심은 햇빛도 필요하고 바람도 필요한 듯합니다. 그렇다고 섣불리 햇빛에 내어 놓았다가는 난 잎이 화상을 입어 시커멓게 될 지도 모릅니다. 천천히 아침 햇볕부터 쪼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다음에 난석 좀 사가지고 내려와서 다시 잘 심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한 주일에 한 번씩 내려오니 내년 가을에는 이 친구 진료실 안에서 그윽한 철골소심의 향을 즐겨볼까 합니다. 해진 와이셔츠 깃을 이천원을 주고 뒤집어 붙여 입고 있다는 내 친구는 틀림없이 함지박만한 웃음을 내게 선물할겁니다.

여기가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께서도 좋아하시겠지요. 그러실 겁니다. 아무렴요.

오근식〈건국대병원 홍보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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