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15:18 (금)
〈동심초〉 여인과의 인연 
〈동심초〉 여인과의 인연 
  • 의사신문
  • 승인 2016.01.25 08: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준기의 마로니에 단상 〈31〉

나는 얼굴이 잘생기지 않은 편에다가 키도 작고 몸집도 작아 남자로서의 매력이 적다. 따라서 젊어서부터 여자에게 관심을 받은 적이 없다. 내가 일방적으로 어떤 여성을 생각하고 좋아한 경우는 있었으나 대부분은 상대방이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진행한 경우에도 자신이 없어 조금 접근하다가 지레 겁을 먹고 물러서기가 일쑤이어서, 내 청춘의 많은 시간을 실연(?)의 아픔으로 보내야 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나에게 호감을 가진 여인도 있었던 것 같다. 다만 내가 우둔하고 눈치가 없어 그 당시에는 정확히 깨닫지 못했다. 여기 그 이야기를 전한다.

나는 의대 본과 3학년 때 친구 따라 의과대학생들로 구성돼 있는 의료봉사 동아리에 가입하였다. 이 단체는 살벌한 기초의학 공부 과정을 통과해 정신적 여유가 생긴 학생들이 봉사도 하지만 미래의 배우자도 탐색할 겸 친목을 도모하는 모임이었다. 여기서 우연히 초등학교 동창생 3명을 만나게 됐다. 이 중에 2명이 여학생이었으나 나에게는 옛날 기억이 없어 낯설었다. 우리 집은 초등학교와 멀리 떨어져 있어 방과 후에는 학우들과 접촉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같은 여자의과대학교에 다니는 두 동창생이 학교축제에서 합창을 한다고 우리 남자 둘을 초대하였다. 음악회에서 동창생 A가 김성태 선생님 곡인 〈동심초〉를 독창으로 불렀다. 애인과 헤어져 못 만나는 안타까운 심정을 내가 기대했던 것 보다 훨씬 잘 표현했다. 중고등학교 때 전문적으로 성악지도를 받았다고 했다.

이 가곡의 가사는 당나라 여류시인 설도(薛濤)가 쓴 〈춘망사(春望詞)〉 세번째 절을 김억 시인이 번역한 것이다. 특이하게도 그 한시(漢詩)의 같은 부분을 다르게 해석한 두 편의 번역시를 작곡가가 〈동심초〉의 1, 2절로 삼았단다. 워낙 둘 다 좋아서 버리지 못했다고.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갖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한갖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바람에 꽃이 지니 세월 덧없어
 만날 길은 뜬구름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갖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한갖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그 해 여름방학 때 동아리에서 강원도 평창으로 무의촌 의료봉사를 가게 되었다. A도 참여했으나, 나는 산골 마을에 고정 배치되어 그녀와 만나지 못했다. 봉사를 끝내는 날 오랜만에 만나니 아주 반가웠다.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A는 나에게 가곡 〈동심초〉를 노래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가사 내용에서 느끼는 감정에 맞추어 음색과 톤을 바꾸어야 한단다. `꽃이 바람에 질' 때는 쓸쓸하게, `만날 기약을' 노래할 때는 간절하게, `마음끼리 맺지 못할' 때는 안타깝게, 후렴은 관조적 서정적으로…

가을에 열린 기숙사 파티에 A가 파트너가 없다고 해서 내가 참석하였다. 그 후 우리는 둘이서, 또는 동창생 넷이서 대학로 학림다방에서 가끔 만났다. 화제는 주로 클래식 음악이었던 거 같다. 성악이 가장 쉽게 마음에 닿고, 연주곡 중에서 피아노 곡이 점점 좋아진다는 등. 집안이 독실한 침례교인으로 모태신앙을 가진 A는 믿음이 깊었다. 나는 불교에 다소 기울여져 있었지만 종교 이야기도 재미있게 나누었다. 밝으면서도 다소곳한 그녀를 대할 때에는 마음이 편했지만 친구 이상의 감정이 들기도 하였다.

본과 4학년 여름방학 때 이화여대 강당에서 〈Jesus Christ Superstar〉 뮤지컬이 인기리에 공연되고 있었다. 그녀가 학생 수준에는 비싼 티켓을 구입해 나를 초청하였다. 이 곡은 뮤지컬의 황제라는 Andrew Webber가 작곡한 Rock 뮤지컬로 젊은이 취향에 맞는 흥겨운 공연이었다. 즐겁게 관람한 후 자연스럽게 둘이서 학교 뒤 숲 속 오솔길을 산책하였다. 밤하늘에는 보름달이 훤하게 비추고, 더운 바람은 잦아들고, 호적한 길은 산림 내음으로 가득하고, 그녀의 목소리는 윤기가 있었다. 나는 낭만적이라고나 할까 표현하기 어려운 묘한 분위기를 느꼈다. 무언가 행동으로 옮겨야 하지 않나 생각했으나, 자신과 용기가 없어 결정을 못하다가 그만 정류장까지 내려왔다. 뜻하지 않게 빨리 온 버스에 그녀는 오르고, 나는 그녀를 배웅하고, 그 후 연락이 끊어졌다.

졸업 후 대학병원 전공의로 바쁜 생활을 보내고 있는데, A가 가족과 함께 뉴질랜드로 이민 간다는 소식을 다른 여자 동창생이 알려왔다. 시간이 없어 환송자리에 못 가고 한국 대표가곡이 녹음된 카세트 테이프만 전달하였다. 물론 우리 운명의 곡 〈동심초〉도 수록되어 있고.

시인 김소월의 스승이기도 한 김억 선생님이 감흥에 젖어, 우리 말로 두 번 다르게 번역한 한시 구절은 다음과 같다.

 風花日將老(풍화일장로)
 佳期猶渺渺(가기유묘묘)
 不結同心人(불결동심인)
 空結同心草(공결동심초)

평소와 같이 남성으로서 자신이 없어 결정을 못하고 주저하다가 A를 떠내버린 나는, 하나도 버리지 않고 두절 모두 가사로 취한 시인과 작곡가의 용기 있는 지혜에 탄복한다. 한편 그녀와 나를 연결해 주던 〈동심초〉 노랫말은 우연하게도 우리 사이의 `맺지 못하는' 인연을 미리 이야기하고 있었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