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20:55 (금)
[조사]표희정 교수님 영전에
[조사]표희정 교수님 영전에
  • 의사신문
  • 승인 2016.01.18 09: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16년 1월 9일 오후 안타깝게도 우리의 벗 표희정 고대구로병원 신장내과 교수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엘리트 중에서도 엘리트로 초등학교 때부터 영특함을 인정받았다.

경기중고등학교 6년 간 학업이 우수하여 장학금을 매해 받았다. 고등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들어와 학부, 대학원, 전공의 코스를 다 마치고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의 내과 신장학 교수로 활동해 왔다. 그는 뛰어난 지능과 뚝심이 있어 이 분야에 일가를 이루었으나 우리 동기들도 미처 모르고 있다.

우선 표희정 선생은 `박제된 천재'였다.

경기고 시절에 항상 `Top 10' 안에 있는 실력이었고 전공의를 마친 후 내과 전문의 시험에서도 전국 수석을 하였다. 명석한 두뇌와 높은 집중도를 갖고 있어 가능했으나 암기를 강요하는 의학교육에 썩 잘 적응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마음만 잡으면 공부는 그에게 가장 쉬운 일이었다.

표 선생은 `못난 오리 새끼'였다.

그는 동화 속 못난 오리 새끼와 비슷하였다. 보통 오리와 모양이 다른 어린 백조는 외톨이였다. 뛰어난 자질과 높은 이상이 있으나 현실의 성과는 이와 달라 음주를 가깝게 하여 스트레스를 풀기도 했다. 여기에 낯을 가려 때때로 보호막을 쳐서, 밖으로 냉정하고 이기적으로도 보였다. 많은 동료들과 어울리지는 않았으나 내면은 여리고 순수하였다. 생각은 상식적이고 마음이 맞는 친구와는 동료애도 상당하였다.

그는 실은 `우아한 백조'였다.

전공의를 거쳐 전문의가 되면서 그의 진가는 서서히 들어났다. 신장학 이외에도 전반적인 내과의 지식과 식견이 있어 우리나라에서 몇명 안되는 진정한 임상의가 되었다. 마침내 그는 신장학에서 서울의대 OB 집단을 리드하는 인물이 되었다. 사실은 의학 보다도 자연과학이 더 적성에 맞는 학자였다. 어느 상황에서도 사태의 핵심을 정확하게 판단하여 최선의 방법으로 해결하였다. 겉으로는 냉정하게 보이나 속으로 깊은 심성을 가지고 있었다. 공부도 끈끈하게 했고, 몇 친구와 부부모임을 즐겼다. 나에게도 적절한 순간에 결정적인 좋은 충고를 해 주었고, 최근에는 “살아있을 때 만나자.”는 말을 자주하였다.

우리는 내과 전공의 시절 부터 이문호, 고창순, 이정상 교수를 모시고 같은 그룹이 되어 가깝게 지냈다. 그의 능력을 잘 알고 있기에 나는 표 선생이 언젠가는 의학계에서 큰 일을 할 거라고 기대하여 왔다. 그러나 그는 죽기 전에 가장 아름답게 부른다는 `백조의 마지막 노래'를 들려주지 않고 떠나가 버렸다. 다만 효성어린 따님 부부가 행림가족으로 대를 잇고 있다.

의학의 이방인처럼 비껴 서 있던 못생긴 오리에서 백조로 탈바꿈했지만 마지막 노래를 부르지 못하고 63년의 아쉬운 삶을 마치고 우리와 헤어지는 표희정 선생! 요즘 한참 유행하고 있는 `100세 인생'의 가사처럼 “60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젊어서 못 간다고 전해라.”하고 안 갈수는 없었는지.

“표 선생, 이제 백조의 노래는 안 불러도 되네. 친구인 우리들은 안 들어도 다 알고 있잖아? 이제 모든 것 훌훌 털어버리고 하늘나라에 먼저 가 계시게나.”

정준기 서울대병원 핵의학과 교수 호곡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