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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길, 둘레길<29>
올레길, 둘레길<29>
  • 의사신문
  • 승인 2009.10.15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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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동안 조깅이 유행하더니 뛰는 것보다 걷기를 선호하고, 자동차 여행보다 도보 여행자들이 늘고 있다. 집 근처에 공원이 있어서 저녁 식사 후 운동도 할 겸 나가면 운동장 주변의 트랙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한밤중에 떼 지어 걷는 것이 꼭 중국 영화에 나오는 강시들 같다고 웃었는데 우스꽝스러운 그 무리에 섞여서 세 바퀴를 돌면 30분을 걷게 된다. 걷는 중간에 맷돌 체조나 배꼽 체조 팀에 섞여서 따라하다 보면 어느새 한 시간이 지난다.

도보 여행 하면 생각나는 것이 언젠가 읽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자세히 기록한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 스페인의 그 길을 걸어봐야지 했는데 요즘 우리나라도 각종 걷기 코스를 만들어 여행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제주의 올레길, 지리산의 둘레길, 남도 갯길, 무등산 옛길, 강원도 바우길 등 이름도 매혹적이다.

60년대인 초등학교 여름 방학 때 외갓집엘 가려면 포장되지 않은 도로를 시외버스로 가야했고 나는 항상 지독한 차멀미로 고생했다. 도저히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버스에서 내려서 걸어가는 것이 그리운 외할머니를 만날 생각과 즐거운 방학을 앞둔 고행길이면서 순례길이었다. 그러나 걸으면서 만나는 각종 야생 꽃들과 나비들, 발 앞으로 뛰어드는 메뚜기와 방아깨비, 모자 위에 날라와 앉는 잠자리까지 메스꺼움과 울렁거림에서 해방된 내게 길동무가 되 주곤 했다.

언젠가 개학을 앞두고 서울로 와야 하는데 쏟아진 폭우로 강이 불고 다리가 끊겨서 버스가 들어오지 못한 적이 있었다. 할머니와 나는 할 수 없이 배를 타고 건너서 버스를 탈 수 있는 곳까지 두 시간 남짓 걸어 나와야 했다. 강물이 계속 불면 서울에 안 가고 할머니와 같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나는 공연히 심술이 나서 툴툴거렸고 할머니는 그런 내 손을 꼭 잡고 걸음을 재촉하셨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그때 할머니와 같이 걸었던 길의 일부는 팔당댐으로 수몰이 되었고 남은 길은 포장이 되어 팔당댐을 돌면서 퇴촌까지 이어지는 근사한 드라이브 코스가 되었다.

이번 추석에 팔당댐 주변과 퇴촌, 분원을 거쳐 양평으로 이어지는 길을 돌아보게 되었다. 이 길은 유년기의 추억이 남아 있는 산과 들을 볼 수 있고 차를 세우고 잠시 걸을 수도 있는 익숙하고 친근한 곳이다. 외가가 있던 집터에는 몇 년 전까지 빈터였는데 어느새 모텔이 들어서 있다. 내가 뛰어 놀고 걸었던 그 길들을 따라가다 보면 희미하지만 여전히 옛 모습이 그려진다.

차창 밖으로 지나는 것들은 마치 영화나 그림 속 타인의 세계 같다. 그러나 그곳을 걸으면 그림 속으로 내가 들어가고 그 풍경이 내 속으로 들어온다. 빠르게 지나는 모든 것들은 쉽게 잊혀지지만 천천히 걸으며 담아 놓은 것들은 오래오래 남겨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걷는 것을 즐기나 보다. 어쩌면 너무 서두르고 너무 속도를 내는 우리들에게 걷는다는 것은 순례자가 걷는 산티아고 가는 길처럼 자신을 돌아보고 주변을 돌아보게 해 지친 삶에 쉼표를 만들어 주고 위안을 주는지도 모른다.

틈만 나면 숲길 걷기를 즐기는 내게 올레길, 둘레길, 갯길, 바우길이 손짓한다. 봄꽃이 만발한 어느 날, 여름 햇살이 따가운 어느 날, 낙엽을 밟을 수 있는 어느 날, 흰 눈이라도 흩날리는 어느 날, 그곳에 가고 싶은 나는 배낭 하나 등에 지고 벅찬 가슴을 설레며 그 길을 걷고 있을 것이다.

김숙희<관악구의사회장ㆍ김숙희산부인과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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