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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살 배기 `아일란'의 죽음 앞에서
세살 배기 `아일란'의 죽음 앞에서
  • 의사신문
  • 승인 2015.11.02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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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인 호(전 송파구의사회장, 전 서울시의사회 감사)

난민 사태, 이제 `외면'에서 `포용'으로 바뀌길

밀려오는 지중해의 차디찬 파도 포말에 빨간 티셔츠에다 청색 반바지 차림의 세 살배기 `아일란'이 머리를 담근 채 누워 있다. 핏기 없는 하얀 얼굴을 모래 위 반 쯤 파묻고 있는 한 장의 사진. 그 어린이의 비극적인 주검 앞에 “어떻게 저런 일이…” 전 세계가 충격에 휩싸이고 분노하였다.

더욱이 2살 위 형 `갈립'과 나란히 앉아 까르르 웃는 그 어느 날의 평온한 모습과, “아침이면 내 배위에 올라 나를 깨우든 두 아들이 없는 세상, 모든 꿈이 사라지고 살아갈 이유가 없다”며 벽을 치며 오열하는 40세 아버지의 뒷모습은, 아들 두 형제를 둔 나를 울컥하게 했다. 눈시울이 뜨겁고 가슴이 아렸다.

그들의 일상이 얼마나 다급했을까.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단체 IS(이슬람국가)가 점령한 시리아 북부를 탈출할 수밖에 없는 피난민(避難民)들, 그 속에서 `아일란', 형 `갈립'과 어머니가 터키 남서부 휴양지 보드럼 해변에서 숨진 채 발견된 사연은 삶의 가치가 안개처럼 허무함을 깨닫게 한다.

`형아! 어디 가는거야?'
바다 건너 저편에 행복의 보금자리가 있다기에 가족 손잡고 떠나던 그날, 초록 빛 사랑이 가득한 꿈을 품고 신발 끈을 매고 허리춤에 유로화를 챙겼을 것이다.

`파도 풀장 천둥놀이 간다나 봐.!' 세상모른 두 형제는 결의에 찬 부모의 핏발 선 눈빛을 마치 머나먼 여행길 가는 것쯤으로 즐거워했을런지도 모른다.

마지막 고비인 보드럼 해안선에서 안전한 제트스키는 일인당 2천유로, 일반보트는 1200, 구명조끼 착용에 5백유로 추가라는 요구에 허리춤에 남은 유로화를 헤아려 보고, “여기까지 5천유로나 썼는데 나머진 코스 섬에 도착해 써야지…” 지폐를 만지작거리며 5km 지척 바다를 건널 때까지 하늘과 코란을 믿었겠지. 23명이 탄 고무보트에 몸을 싣고 지중해에 오르자 잔잔했던 바다가 1km도 못 가 갑자기 포효하기 시작, 파도가 배를 덮치자 선주는 먼저 물에 뛰어들어 뭍으로 도망가 버린다.

난파당한 배에서 손을 잡고 가슴에 품은 아이들을 놓친 어머니는 “아이란! 갈립! 손 놓지 마!” 울부짖었고, “아빠, 제발 죽지 말어요”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아일란'의 마지막 외침을 들으며 아버지는 끝까지 수면위로 떠받쳤으나 눈에서 피를 흘리며 멀어져 간다.

`아! 아이들만이라도 구명조끼를 입혀 줄 것을…' 자력으로 생존한 2명만은 조끼를 입었다니 구조되어 생환된 아버지의 후회는 얼마나 가혹하랴.

죽음의 바다가 된 그 뱃길에서 연 3500여명이 수장된다니 하루 열 명 꼴이다. 난민들은 삶과 죽음을 배팅한 탈출에서 일단 성공하면 그동안의 고생은 눈 녹듯 녹는다.

그러나 현실은 결코 그들의 꿈만큼 만만치 않다. 유럽의 국민들은 `자기네 생활 복지도 버거운 현실에 무작정 들어와 정착하려는 뜨내기들을 왜 우리가 받아들이느냐'며 그들을 거부하고 장막을 치고 있다. 냉동차에 서른 명의 난민이 고속도로 상에서 시체로 발견되어도 늘상 있을 수 있는 사건으로 치부하며 난민문제는 해묵은 골치 덩어리로 모른 척 밀어 내려고만 한다.

그런데 역사가 바뀌고 있다. `빨간 티 차림의 아일란의 주검'이 준 사진 한 장에 전 세계 네티즌들이 분노의 흐느낌으로 정치인을 질타하고 수레바퀴의 방향을 틀고 있는 것이다. 아이가 천국으로 떠난 후 난민들은 지옥을 빠져나오고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인 `바티칸'에서 난민 두 가구를 받아들이고, 난민 원천 봉쇄라며 유럽과의 지하 터널을 봉쇄했던 영국 케머런 총리가 공식적으로 수용하겠다며 선언하고, 독일 메르겔 총리의 `난민 수용' 결단 후에 뮌헨 역 마루에 내린 8천명 난민 앞에 `환영합니다' 피켓을 든 독일 주민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환대에 난민들은 어리둥절하고 있다.

또 일부 독일인들이 나누어 주는 초콜릿 옷가지 풍선과 인형 선물을 받고 “메르겔 최고! 독일 최고!” 엄지를 세우며 행복한 웃음을 짓는다. 그러나 헝가리에 체류 중인 난민들은 빈으로 가는 차로와 열차를 통제당하자 걸어서라도 가겠다며 3천여 명이 부다페스트 도로를 시위한다.

아직도 유럽은 휴머니티와 자국경제를 저울질하고 있는 중이고 그리스 해안으로 가는 길에 난민 아이들이 수장되고 있다. 전쟁과 살육이 없는 나라로 가겠다는 그들 난민들은 어디로 갈 것인지, 영원히 조국을 떠날 것인지 그들 자신도 모른다. 다만 살아야 한다는 일념뿐이리라.

내 어릴 때, 가족 모두 죽을 고비를 넘긴 기억이 생생하다. 1955년 여름 충청도 영동, 한국전 막바지 때였다. 남하했던 북한군이 후퇴하면서 남쪽에 부역한 사람을 색출하여 살육하던 일촉즉발, 선친이 협동조합 직원 명단에 있어 처단 대상이라 피신하는 중이었다.

일가족 5명이 지하 하수도를 타고 숨어 있을 순간,“이 간나 새끼들 분명 이리로 갔다는데…”하며 바로 위에서 총구를 겨누고 있고, 4살 때의 나는 홍역으로 열이 펄펄 거렸고, 어머니는 나를 품고 입을 막았다.

그 순간의 구사일생을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부모님은 떠나셨지만 남북 대치로 전운이 걷히지 않는 이 시대를 살면서 아일란의 피난과 죽음을 보는 나의 마음은 착잡하다 못해 우울하고 화가 치밀기도 한다.

우리의 난민 역사도 오래되지 않았다. 일본 치하 36년 수탈을 받을 때 조국을 등지고 할빈 연의주 등으로 이주, 난민 신분으로 떠돌아 생을 마감하거나 2, 3대 후손들은 이역만리 그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다.

또 6.25 전란의 막바지, 북한을 탈출하려는 엄동설한의 난민 행렬이 끝이 없었던 원산 철수 때, 당시 구축함에 가득한 군수물자를 버리고 난민을 태워 거제도로 이주시킨 미국 장교의 휴머니티는 아직도 한국전쟁 후일담으로 빛나고 있다.

그 때의 피난민들은 인생행로가 변환되어 한국 근대사에 이산가족 아픔의 씨앗이 되었고, 6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이별의 상처가 아물지 못했다. “이번 상봉 때는 만날 수 있으려나…. 죽기 전에 두고 온 부모형제를 만나려는 소원을 이번에는 이뤄지겠지.” 운명처럼 또 한 번 정치인들의 실험대가 무산된다면 아마 민족 역사의 큰 죄인이 될 것이다.

“I don't need your food and water…I need peaceful by passing the border to Europ” 터키를 떠나 230km를 걸어 그리스와 불가리아 경계 `에디르네'에 도착한 어린 남매가 치켜 든 피켓 소망조차 외면당하는 냉혹한 세상 인심이다.

이 글을 쓰는 중에도 들것에 실려 “Do'nt bury me(나를 땅에 묻지 말아 주세요!)” 울며 외치는 예멘의 6살 소년 `파리드 샤키'도 어른들의 내전(사우디 동맹국과 시아파반군) 전쟁놀이 파편에 희생되어 이미 죽으면 묻혀버린다는 매장의 공포 속에 결국 땅에 묻혔다 한다.

월남전이 막바지일 때(1972년6월8일), 네이팜 폭약 세례에 전신 화상을 입고 벌거벗은 채 양팔을 벌리고 울부짖는 소녀(킴푹, 9세)의 절규 모습, 지금도 내 기억에 생생한 그 장면은 월남전을 종식시키는 반전 운동의 시발이자 끝이었다.

인간의 삶과 죽음이 자기 의지대로 할 수 없도록 세팅된 운명이라 하더라도, 피어 보지도 못한 채 파도에 가녀린 몸을 맡겨 자연의 부름으로 하늘로 간 `아일란 쿠르디'!

그의 영상은 “인간사회의 무모함은 역사를 반추하며 영원히 반복된다.”는 어느 역사학자의 말을 되새기며 코스모스 핀 북한강변을 거니는 내 가슴에 두고두고 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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