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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와 환자가 좋아할 때
의사와 환자가 좋아할 때
  • 의사신문
  • 승인 2015.09.25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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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기의 마로니에 단상 〈23〉

사람이 병에 걸리면 마음도 약해지기 마련이다.

많은 경우 의료진의 말과 행동에 예민해지고 정신적으로 의지하기도 한다. 이럴 때 실력있고 친절한 의사를 만나면 더욱 고맙게 느껴지고 작은 일에도 감격할 수 있다. 젊은 환자의 경우 의료인이 이성(異性)이라면 특별한 감정으로 진행될 수도 있다.

의사도 당연히 사람이니까 매력적인 이성환자를 만나면 끌리게 되어 있다. 환자를 진찰하고 검사하고 수술하면서 환자 자체보다는 병을 먼저 보면서 생기는 정신적 긴장과 스트레스 때문에 마음 속 동요가 덜 생기기는 한다. 그러나 미모나 아름다운 육체, 우아한 감성, 높은 지성을 갖춘 이성에게 매력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일반 사회와 접촉이 적은 의과대학과 병원에서만 시간을 보내며 청춘이 된 젊은 의료인은 오히려 쉽게 끌릴 수도 있겠다.

의사와 환자가 서로 좋아하면, 먼저 두 사람 사이에 있는 특수한 상황을 이해하여야 한다. 여기 다소 극단적인 예를 들어 보겠다.

“내과 병동에서 인턴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이다. 배 속에 복수가 생겨 외래 진료를 받고 간경화가 의심되는 20대 중반의 여자 은행원이 입원하였다. 그 당시 간경화는 대부분 수년 내에 사망하는 치명적인 병이었다. 갓 의사가 된 나는 안타까워 성심껏 환자를 돌보았다. 그런데 교수님 회진 중에 복수의 양상이 간경화와 다르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환자가 바로 누워 있어도 뱃속에 찬 물이 옆구리로 평평하게 퍼지지 않고 배꼽 위로 여전히 볼록하게 나오는 것이었다. 정밀 검사 결과 간경화에 의한 복수가 아니라 난소에 생긴 아주 큰 물혹이었다.

환자는 산부인과에서 수술을 받고 완치되었다. 퇴원하는 날 신이 나서 내과 병동까지 인사하러 왔기에 나와 주치의였던 선배 레지던트도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 주었다. 그 후 나는 시립병원으로 파견을 나갔다가 3개월 만에 본원에 복귀하였다. 병원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 왔다.

그 여자 환자였다. 그저 안부 차 전화를 했노라고 했다. 그런데, 내과 레지던트와 산부인과 인턴, 레지던트 모두 같은 전화를 받았단다. 그 환자가 우리들의 근무 스케줄을 알고 추적하고 있던 것이다. 그 후 종종 병원 벤치에 혼자 앉아 있는 그녀를 보았다. 지나가는 남자 의사들에게 유혹의 말을 건낸다는 소문이 돌았고, 나중에는 그 일로 신경정신과 병동에 입원했단다. 그 후 1년이 지나서 버스 안에서 우연히 그 환자를 만났다. 나를 보고는 여전히 반갑게 웃으면서 이제는 완치됐다고 말하며 차에서 내렸다.”

그 여자분은 간경화라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새로 얻은 삶의 기쁨이 의료진에 대한 감정과 동일시 되었을 것이다. 바쁘게 돌아가는 병동에서 사람을 살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의사가 멋있게도 보였을 것이다. 사회생물학적으로 볼 때 남녀가 다른 이성에서 느끼는 매력이란 그 사람과 짝이 되어 후손을 가졌을 때 유전될 수 있는 우성 형질이다. 잘 생긴 외모나 신체도 중요하지만 지성, 성실성이나 어떤 능력 같은 무형의 형질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따라서 젊은 사람이라면 이성의 의료인에게 쉽게 매력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감정은 자연인의 개인적인 매력이 아니라 의료인에 대한 일반적인 호감과 환상 때문에 생긴다. 이 여자의 경우처럼 어느 의사나 상관없다는 태도가 된다.

오랫동안 진료를 받다 보면 질병에 대항하여 같이 싸우는 의사와 환자 사이에 가족 같은 연대감이 생기기도 한다. 비슷한 예가 영화나 연극, 드라마를 만들 때 대본에 의해 사랑하는 남녀의 역할을 하는 경우이다. 연기자가 스토리에 심취하면 극 속의 인물로 착각하여 잠시나마 진짜 애인 같은 느낌이 생겨 마음이 동요된다고 한다. 실제로 가상의 사랑이 현실에서 애정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다. 비슷한 일이 환자와 의사 사이에 생길 수 있다.

의료진과 환자인 경우 이러한 여러 특수한 상황이 복합되어 있어 두 사람간의 진정한 관계가 과대포장되어 보일 수가 있다. 또한 남녀 간의 사랑은 줄다리기여서 서로 주고 받고, 밀고 당기면서 진전되고 익어가는데, 의사와 환자가 좋아할 때는 순조롭게 감정이 교류되기 어렵다. 좀 더 냉정한 자세로 서로의 진심을 분석해야 한다.

의사와 환자 사이에 적절하지 않은 일이 생기면 의료인의 과오가 더 큰 법이다. 두 사람의 관계를 의료인이 주도하기 때문이다. 또 베푸는 입장이기 때문에 약자를 보호한다는 윤리 원칙에서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정상에서 벗어난 의사-환자 관계는 올바른 치료에 방해가 된다. 양측 모두 객관성을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 이석형 공이 만든 한국의 히포크라테스 선서인 `의원정심(醫員正心)'에서 환자를 성(聖)스럽게 대하라고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 환자가 정말 나의 천생연분이라고 생각되면 어떻게 할까? 환자-의사의 관계를 정리한 후에 추진하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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