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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 명장의 오블리제 노블리주 
시계 명장의 오블리제 노블리주 
  • 의사신문
  • 승인 2015.07.13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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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기의 마로니에 단상 〈18〉

*요즘 메르스 사태로 고생하는 의료진을 위로하는 민심이 나타나고 있다. 사회가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알 수 있고, 우리가 사회에서 어떻게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지를 암시하여 준다. 이번 글이 우리가 이러한 방향을 정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돈을 벌기 위하여 가진 평생 직업이 본인이 평소에 하고 싶은 일이라면 그는 누구보다도 행운아이다. 외딴 시골 가난한 집안에 개구쟁이 중학생이 있었다. 1960년대 당시에 60명, 한 반 학생 중에 3명만 손목시계를 가지고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장난을 하다가 친구 손목시계가 땅에 떨어져 시계의 뒤 뚜껑이 열렸다. 복잡한 황금색의 시계 부품 속에 햇빛에 반짝이며 움직이는 무브먼트를 보자 자기의 심장도 같이 뛰고 있는 것을 느꼈단다. 그 순간 시계가 내가 가야할 인생이라고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 학생이 정윤호이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다음날 읍내 시계방에 견습생으로 출근하여 시계수리와 제조의 인생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그 가게에서 열심히 일해 모든 것을 다 배우자 더 큰 시계방에 이직하여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만족할 때 까지 28번이나 직장을 옮겼단다. 이런 노력의 결과 1986년에 미국시계학회(ACWI)에서 공인하는 고급시계사高級時計士가 되고 2000년 대한민국 명장으로 인증 받았다. 그는 마치 전생부터 이 일을 했던 것처럼 쉽게 익숙해지고, 50년을 하면서도 항상 새로운 것을 배워 즐겁다고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자식 시계를 이용하는 요즘에도 옛 아날로그시계를 찾는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단다. 서울에서 두 개의 시계방을 운영하면서 시계 마니아의 주문으로 세상에 둘도 없는 수제 제품을 제작하고 있다. 보통 200개에서 300개가 되는 부품을 직접 만들고 가장 정교한 시계인 경우에는 2000개까지 부속품이 필요하다. 특히 극한적인 환경에서 활동하는 탐험가나 군인의 경우 전자식 시계는 오작동 가능성이 있어 요구에 맞는 특수 제품을 만들어 준다.

그의 상점을 방문하여 평생 수집한 애장품을 볼 기회가 있었다. 인류의 지혜를 총망라한 듯 시계가 다양하였다. 금속 볼을 수차로 이용한 시계, 이슬람 메카의 방향과 시간을 함께 측정하는 아라비아 시계, 온도에 민감한 특수 액체의 수축과 팽창 에너지를 이용한 아트모스 시계(영구적으로 작동한다), 정오의 강력한 햇살을 볼록렌즈로 모아 대포심지를 태워 작동하는 캐논시계가 흥미로웠다.

그 중 가장 낭만적인 것은 중국에서 만든 용선명이 시계이다. 용머리를 선두에 조각한 좁고 긴 카누 모양의 그릇 위에 기다란 향나무를 놓고 그 위에 두개 구슬을 무명실로 연결하여 9쌍을 가로로 얹어놓았다. 향나무 꼭지에 불을 붙이면 점차 타 내려가면서 그 위에 얹힌 무명실이 순서대로 타며 끊어져 구슬방울이 징 위에 떨어지는 소리로 시간을 알려 준다!

우리나라에도 특수한 시계가 몇 점 있었다. 세종대왕이 신하들과 개발한 앙부일구는 태양위도에 따른 그림자의 높이를 이용하여 시간과 함께 절기를 측량했다. 해시계에 각종 장식을 꾸며 황제의 위엄을 과시하던 중국시계와는 달리 백성의 농경생활에 도움을 주고자 했던 우리 군주의 선한 의지가 담겨있다. 세종은 휴대용 물시계(行漏)도 만들었다. 전쟁 중 정확한 시간에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 사용하였다. 세계에서 희귀한 휴대용 물시계인데 기록만 있고 안타깝게 전수가 안 된 상태이다.

나는 정윤호 명장과 서울대학교병원 탑시계를 수리하면서 알게 되었다. 고종황제가 근대화 정책을 시행하면서 경복궁내에 서양건물인 건청궁과 함께 시계탑을 세웠다. 군주는 시간을 측정하여 백성에게 알릴 의무가 있어 그동안 사용하던 해시계와 물시계를 폐기하고 서양 시계탑을 세운 것이다. 서양문물을 받아드리겠다는 일종의 상징물인 셈이다. 미국과 직접 교섭해 일본 보다 일 년 먼저 경복궁에 전기를 놓고, 같은 해에 종로에 전차를 가설하였다. 이 한성전기회사 사옥에 조그마한 시계탑을 얹었다. 1908년 고종황제가 의료 근대화의 일환으로 대한의원을 세우면서 세 번째인 시계탑을 건물 중앙에 배치하였다. 이 오래된 탑시계가 고장 나 고치지 못하던 것을 정 명장이 2014년 봄에 성공적으로 수리하였다. 우리 병원 박물관에 특별전을 열어 기념하였고, 시계는 지금 시계탑 3층에 전시되어 있다.

정윤호 명장은 반세기 동안 한결같이 시계 수리와 제조의 길을 걸으면서 사명감을 점차 느끼게 되었다. 온 인류의 문화 과학 유산인 시계를 지키고 육성하겠다는 자각이었다. 곧 사비를 들여 서울 교외에 시계 박물관을 열 계획이다. 평생 모은 1600점의 자식 같은 물품과 함께 대한의원 탑시계 복제품도 전시한다. 이 분야에서 선조들의 노력, 천재성, 역사의식을 기리는 장소가 될 것이고 자라나는 이공학도에게는 체험교육장으로 사용할 것이다.

그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또 하나는 시계를 감정하는 일이다. 소위 명품시계를 가짜 제품이나 가짜 부속품으로 바꿔치는 경우이다. 검찰이나 법원 요청에 따라 감정을 해 오면서 당사자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생명의 위협까지 느낀 적도 있단다. 그러나 정 명장은 건전한 선진사회가 되려면 전문가가 해야 할 의무로 인식하고 공식적인 시계 감정서 작성을 기꺼이 맡아 하고 있다.

외진 시골 출신으로 성심껏 노력해 일가를 이루고 이제는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자발적으로 하고 있는 그를 보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사회 지도층이 앞장서서 의무와 책임을 다 하는 것을 `노블리제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고 말한다. 평범한 사람이지만 어떤 분야 전문가로 책임과 의무를 다하여 사회 지도층 역할을 하는 것을 `오블리제 노블리주(Oblesse Noblige)'로 부를 수 있지 아닐까? 진정 이 분들이 더 고귀한 지도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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