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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 역사, 선교측면만 부각은 무리_큰 틀에서 봐야"
"제중원 역사, 선교측면만 부각은 무리_큰 틀에서 봐야"
  • 김기원 기자
  • 승인 2015.03.17 16: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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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재승 의학역사문화원장과 김상태 교수는 지난 16일 정오 함춘회관에서 '제중원 130주년 기념행사 개최'와 관련, 기자간담회를 갖고 "제중원의 역사를 오로지 선교측면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큰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바라보는 것과 같다"고 비판했다.

서울대병원 의학역사문화원 백재승 원장(비뇨기과 교수)과 김상태 의학역사문화원 교수(서울대 대학원 국사학 박사)는 지난 16일 정오 함춘회관에서 '제중원 130주년 기념행사'와 관련 기자간담회를 갖고 서울대병원 입장의 '제중원의 역사적 진실'에 대해 소상히 설명했다.

특히 백재승 원장은 미국 러퍼트 대사 피습 치료를 계기로 다시 불거진 '제중원 역사 논란'에 대해 깊은 유감을 나타냈다. 이어 백 원장은 "제중원의 역사를 오로지 선교측면에서만 해석하는 것은 역사의 큰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바라보는 것과 같다"며 논란의 파트너에게 '큰 틀에서 역사를 바라볼 것'을 강력히 권유했다.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감상태 교수는 "제중원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우연하게도 당시 관세 수입 부문에 제중원 운영지침이 발견됐다"며 "이는 관세수입이 제중원의 예산으로 제공됐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국내 대표적인 두 병원이 제중원의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 각각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는 것과 관련, 백재승 원장은 "그런 모습으로 비치는 것 역시 유감스럽다"며 "누가 옳다 그르다 이야기 하기 싫다. 다만 역사적인 사실을 학술적인 측면에서 접근했으면 하는 바람 뿐"이라고 말했다.

특히 백 원장은 "역사를 모두 선교 측면에서 조명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며 "이는 균형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백 원장은 "제중원을 상표등록한 점도 사실 이해하기 어렵다."며 "그러나 우리는 끝까지 정도를 지키겠다. 모든 논란은 학술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재차 밝혔다.

백 원장과 김 교수는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일전에 김 교수가 한국일보에 기고한 '제중원의 진실_연세대 정종훈 교수에 답한다'와 '제중원의 진실 Q&A'를 서울대병원측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제시했다. 

아울러 제중원 130주년 기념행사로 오는 4월3일 기념식 및 학술강좌 개최, 4월6일 기념음악회 개최, 4월7일 진료 봉사 실시, '4월8일 역사화보집 출판기념회 및 역사 사진전 개막식 개최건에 대해 소개했다.

한편,  이날 서울대병원 의학역사문화원이 밝힌 '제중원의 진실 Q&A'는 다음과 같다.

-알렌이 제중원을 설립했다는 주장은 사실인가?

그렇지 않다. 미국북장로회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은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 발발 당시 일본인을 제외하면 조선에 거주하던 유일한 양의(洋醫)였다. 그는 갑신정변 때 큰 부상을 입은 정계의 실력자 민영익을 치료했다. 그로 인해 고종과 명성황후의 신임을 얻게 되었고, 서양식 국립병원의 설립을 편지로 건의했다. 이렇듯이 알렌이 제중원 개원에 기여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조선정부는 이미 근대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서양의료의 도입을 추진하고 있었고, 그 과정에 알렌의 건의가 도움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누가 제중원 설립을 준비하고 있었나? 

고종과 조선 정부는 이미 1881년 일본에 파견한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을 통해 서양식 의료를 탐색했다. 1884년 4월 22일에는 정부 기관지《한성순보》를 통해 서양의학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같은 해 6월 하순, 일본 주재 미국감리회 선교사 매클레이(Robert S. Maclay)가 건너와 서양식 병원의 설립을 제안했을 때 이를 허락했다. 즉 알렌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서양식 국립병원의 설립은 추진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신정변 당시 알렌의 서양의술을 목격한 고종과 고관들이 설립 준비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 결과 1885년 4월 한국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인 제중원이 개원하게 되었다.

[주] 매클레이가 제안한 서양식 병원이 조선의 국립병원인지 선교병원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고종과 조선정부의 입장에서는 국립병원으로 이해한 것이 틀림없다. 당시 별기군, 박문국, 육영공원 등 서양식 기관은 모두 국립기관이었다. 결국 갑신정변이라는 돌발 상황만 일어나지 않았다면, 고종과 조선정부는 당초 매클레이와 약속한대로 미국감리회측 의료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서양식 국립병원, 즉 제중원을 설립했을 것이다.

-고종과 조선 정부가 제중원을 설립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설립 목적은 무엇이었나?

고종과 조선 정부는 1880년대에 근대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군사 분야의 별기군, 언론·출판 분야의 박문국, 교육 분야의 육영공원 등 일련의 서양식 국립기관들을 설치했다. 마찬가지로 의료분야에서도 제중원이라는 서양식 국립병원을 설립했다.

전통의학이 외과 질환의 치료나 전염병 퇴치에 약점이 있었기 때문에 서양의학을 적극 도입하여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다. 고종과 정부가 명명한 제중원(濟衆院)의 뜻은 백성을 구제하는 집(관청)입니다. 백성에게 더 나은 의료를 제공해서 더 나은 삶을 보장하려는 국왕과 정부의 소망이 제중원이라는 명칭에 잘 나타나 있다.


-제중원은 국립병원이었다는 보다 구체적 근거들을 알고 싶다.

제중원은 조선 정부의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지금의 외교부)에 소속된 국립병원이었다. 실제로 1885년 4월 3일 제중원의 개원을 알리는 방문(榜文)도 이 부서에서 붙였다. 조선 정부는 부지와 건물(개원 당시의 재동 제중원과 1886년 하반기에 이사 간 구리개 제중원 모두), 행정인력, 예산 일체를 제공했고 제중원 운영규칙도 작성했다. 알렌, 헤론 등 당시 제중원에서 활동한 의사들도 공식 보고서나 편지 등에서 제중원을 ‘정부병원(the government hospital)’이라고 명백히 표기했다.

제중원에서 미국인 의사가 활동한 것처럼 별기군에서는 일본인 교관이, 육영공원에서는 미국인 교사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렇다고 해도 이들 모두는 당연히 국립기관이고, 역사학자들도 이들 기관을 국립기관이라고 규정한다.


-제중원 원장이 알렌, 에비슨 등 미국북장로회 의료선교사들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사실인가?

당시 조선에 양의(洋醫)가 없어서 미국인 의료선교사들에게 환자 진료를 맡겼다. 하지만 제중원 당상(堂上, 오늘날 개념으로 제중원 원장)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독판(장관)이나 협판(차관)이 겸직했다.

제중원 당상은 제중원의 전반적인 운영에 관해 결정하고 감독했으며, 최종적인 책임을 졌다. 실제로 제중원의 첫 당상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자 온건개화파의 핵심인물이던 김윤식이었다. 그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독판으로 재직 중 제중원의 설립 준비의 총책임을 맡았고, 개원과 동시에 당상을 겸직했다. 별기군, 육영공원, 연무공원(鍊武公院, 오늘날의 사관학교) 등 다른 서양식 기관들도 똑같았다. 즉 각 기관에서 활동한 외국인들은 초빙되어 온 전문가일 뿐 기관장은 아니었다.

각 기관의 운영, 감독 등 최종적인 행정 책임은 모두 정부 고위관료들의 몫이었다. 그런 만큼 알렌, 헤론, 에비슨 등 미국북장로회 의료선교사들은 제중원 원장이 아니라 제중원의 의사(진료부문 책임자)라고 규정하는 것이 맞다.


-광혜원과 제중원은 다른 병원인가? 헷갈린다.

같은 병원이다. 조선 정부는 1885년 4월 12일부터 ‘광혜원(廣惠院)’이라는 명칭을 사용 했다. 그런데 2주일 후인 26일에 고종의 재가를 받아 ‘광혜원’이라는 명칭을 백지화하고 ‘제중원(濟衆院)’이라는 명칭을 12일로 소급해 사용했다. 광혜원이라는 이름에 무엇 인가 하자가 발견되어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이름이 된 것이다. 충북 진천군 에 광혜원(한자도 같음)이라는 국립 숙박기관(언제부턴가 지역 명칭이 됨)이 있어서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현재 국민들 사이에서는 ‘광혜원’이라는 명칭이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근래 학계에서는 ‘제중원’이라는 명칭만 사용하고 있다.


-제중원의 위치는 어디였나?

제중원은 갑신정변을 주도했다가 실패한 홍영식의 집에서 출발했다. 이점은 중요한 사안이다. 홍영식은 갑신정변이 실패하면서 청나라 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가 역적이 되었기 때문에 그의 집은 조선시대의 관행대로 정부에 몰수되어 국유재산이 된 채 흉가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 제중원이 자리를 잡았다는 것은 결국 제중원이 국립병원이었다는 증거다. 오늘날 이곳은 헌법재판소의 .일부가 되어 있다. 1886년 11월경 고종과 조선 정부는 더 넓고 쾌적한 곳인 구리개(지금의 을지로 입구)로 제중원을 옮겼다.


-1894년에 고종과 조선 정부가 미국북장로회(에비슨, Oliver R. Avison)에 제중원을 이관했다고 한다. 모든 것을 다 넘겨버렸나?

운영권만 위탁한 것이다, 소유권은 갖고 있었다. 그 당시 역사적 배경이 중요하다. 1894년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파란만장한 해였다. 동학농민전쟁, 청일전쟁, 갑오개혁이 연이어 발생했다.

특히 7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해버린 사건은 고종과 정부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이 위기에서 일본에게 뺏기지 않으려는 고육지책으로 제중원을 에비슨에게 위탁한 것으로, 소유권까지 양도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계약조건에 의하면 조선정부가 원할 때는 언제든 제중원을 반환받을 수 있었다. 에비슨측이 요구한 것은 자기네가 제중원 건물을 개·보수했을 경우 그 수리비용을 지급해달라는 것 뿐이었다.

실제로 에비슨 등은 제중원을 운영하면서도 조선정부가 제중원을 돌려달라고 할까봐 늘 걱정했다. 그러던 중 1904년 에비슨 등은 미국 갑부 세브란스의 도움을 받아 자금을 마련하여 제중원을 떠나 세브란스병원을 개원했다. 그러자 1905년 대한제국 정부는 에비슨 등에게 제중원 수리비용을 지급하고 제중원을 돌려받았다.


-제중원이 세브란스병원으로 이어졌다는 주장은 맞는가?

자의적인 역사인식이다. 제중원 의료진이 세브란스병원으로 이동함으로써 제중원 운영이라는 경험적 자산이 세브란스병원에 전수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세브란스병원이 직접적으로 제중원을 계승했다고 볼 수는 없다.

국립병원 제중원을 수탁 운영하던 사람들이 자금을 마련하여 1904년에 자기네 병원을 완공하고 독립한 후 기부자의 이름을 따서 세브란스병원이라고 명명했다. 이듬해에는 대한제국의 요청으로 제중원을 반환했다. 그러고는 ‘세브란스병원’이라는 새 공식 명칭과 ‘제중원’이라는 종전 근무지의 명칭을 병용(倂用)한 경우다. '제중원'의 브랜드 가치를 이용하여 세브란스병원과 선교사업을 활성화하고 싶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그럼 제중원과 서울대병원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고종과 조선 정부는 국립병원 제중원을 설립하면서 특별히 두 가지 임무를 부여했다. 하나는 제중원 의학당을 설립하여 총명한 젊은이들에게 서양의학을 가르쳐 유능한 의료인으로 키우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가난한 환자들을 무료로 치료하는 것이었다. 백성을 구제하는 집(관청)이라는 뜻을 지닌 제중원(濟衆院)다웠다. 요약하면 국립병원 제중원의 사회적 책무는 서양의학 도입을 통한 의료 선진화와 전통시대 공공의료의 계승이었다.

이 과제는 130년이 지난 지금 복잡하고 급변하는 의료 환경 속에서도 이 땅의 국공립병원들이 반드시 기억하고 계승해야 할 숙명적 과제다. 그래서 한국 근현대 의료사에서 국가중앙병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온 서울대병원이 한국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인 제중원을 재조명하고, 제중원의 역사적 경험과 정신적 가치를 계승하기 위해 맨 먼저 나선 것이다. 서울대병원은 제중원 150주년에는 모든 국공립병원과 함께 제중원을 기념하고자 한다.

[의학역사문화원 주] 아쉽게도 제중원의학당은 조선 정부의 정치적, 경제적 위기 때문에 졸업생을 배출하지 못하고 유명무실해졌다. 한반도 안에서의 첫 양의(洋醫) 양성은 1902년 의학교(서울의대의 전신) 제1회 졸업생 19명의 탄생으로 비로소 결실을 맺었다.
 

김기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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