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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악산에서 만난 감자란<4>
치악산에서 만난 감자란<4>
  • 의사신문
  • 승인 2009.07.16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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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위를 걷다

▲ 치악산 고사리<사진 위 왼쪽>, 둥글레 <사진 위 오른쪽>,붓꽃 <사진 아래 왼쪽>, 해마다 이렇게 풍성하게 피어나기를 돌탑 앞에서 기원했다. 지나온 길가에 함초롬히 피어 있던 야생난 꽃도 그렇게 남아 있기를<사진 아래 오른쪽>
 
바람에 날리는 안개비 속에서 홀연히 내게 다가온 야생난 한 촉이 이렇게 나를 들뜨게 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콧노래가 절로 나오고 걸음걸음이 둥실둥실 떠오릅니다. 구름 위를 걷는 듯 했습니다. 포도원 가득한 나파 밸리의 길을 걷던 `A walk in the cloud'의 주인공이 이런 기분이었을까요.

모든 것이 가볍고 즐거운 길입니다. 눈만은 여전히 분주했습니다. 보아주기를 기다리는 난 꽃이 어디서 살포시 나를 올려다보고 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면서 숨을 몰아쉬며 지나가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갑니다.

그러나 이 길은 내가 그렇게 쉽게 지나가 버리기에는 너무나 소중한 길입니다. 저 아래 어디쯤엔 어린 삼형제들 배곯지 않게 키우려 어머니 아버지가 뼈골이 빠지도록 가꾸었던 화전 옥수수밭이 있었습니다. 한겨울 조리를 만들기 위해 미끈하게 뻗은 조릿대를 찾아 산 속을 헤맸던 아버지의 발자국을 내가 밟고 갈지도 모릅니다. 치악산은 내겐 그런 산입니다.

서너 촉의 난 꽃을 더 만나 시간을 보내다 점심시간을 훌쩍 넘겼습니다. 그래도 우람하게 자란 고사리와 허리춤까지 자란 둥굴레, 활짝 피어난 붓꽃은 예사롭게 보아 넘길 수는 없었습니다. 둥굴레 잎에는 은근한 무늬까지 들어 있군요.

갑자기 눈앞이 훤해지며 꽤 넓은 개활지가 나타났습니다. 때맞추어 안개비도 잦아드니 여기서 점심을 먹고 잠깐 눈도 좀 붙여야 하겠습니다. 약간 경사진 풀밭에 돗자리를 펴고 신발까지 벗으니 온 몸이 가뿐 합니다.

아침에 민박집 아주머니께서 건네주신 도시락을 꺼냈습니다. 김치에 산나물 무침에 멸치조림까지 여섯 가지나 되는 반찬들을 비닐 주머니마다 담아 꽁꽁 동여 맨 아주머니의 손 맵시가 감탄스럽습니다. 이렇게 된장국까지... 점심으론 아주머니의 정성을 먹었습니다. 점심으로 혼자 먹기엔 양이 좀 많았지만 남기지 못했습니다. 아주머니의 투박한 손과 문밖까지 배웅해 주신 아저씨의 눈길이 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쪽 풀밭에서 사람들이 무언가 뜯고 있었습니다. 대화 내용으로 보아 당귀가 자라고 있는 듯합니다. 몇 잎사귀 뜯어 쌈이라도 싸 볼까 하다가 이내 접었습니다. 언젠가 뉴스에서 독초를 당귀로 잘못 알고 먹어 화를 당한 사람들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그냥 자라게 두어야 할 것들입니다.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하고 배낭을 베고 누웠습니다. 찌뿌드드하던 허리가 시원해집니다. 짙은 구름이 해를 가려주는 바람에 굳이 그늘을 찾을 필요는 없었습니다. 깜박 잠이 들었다가 얼굴에 툭툭 떨어지는 빗방울에 잠을 깼습니다. 이렇게 달콤한 낮잠이 얼마만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이제부터는 부지런히 길을 재촉해야 할듯합니다. 그렇다고 비로봉에 있다는 돌탑들을 보지 않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습니다. 인천에서 이곳으로 처음 이사와 산골생활에 재미를 붙여가던 초등학교 2학년때 처음 돌탑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봉우리 끝이 아득했는데 저 높은 곳에 탑이 있다니…. 거기에 정말 탑이 있었습니다. 누군가 돌 하나하나를 이리 맞추고 저리 맞추며 마음속의 소망을 담았을 것입니다.

바라보며 어머니,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내려오는데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빨리 올라가서 아버지께서 40년 전에 보았던 돌탑이 아직 거기 잘 있더라고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처음 보는 난초꽃도 거기 있었노라고.

오근식〈건국대병원 홍보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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