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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부실(華而不實)
화이부실(華而不實)
  • 의사신문
  • 승인 2014.03.03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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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이 있는 정담 〈110〉

북촌길에서 본 현판 `화이실'
정자처럼 지은 한옥처마 아래에 걸린 현판에서 행서체로 내달린 네 글자, 水流華開(수류화개)를 보고나서부터는 글씨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18년 전통의 소머리국밥집 간판은 골목 안쪽에 있는데다 그리 크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아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는 않았지만, 붓으로 쓴 개성 있는 글씨모양에 주인의 자긍심이 보였습니다.

한식집 두어 곳의 간판은 한문 예서체의 글씨가 난삽하지 않고 제법 기품이 있게 보입니다. 주인이 내는 식사도 글씨만큼이나 품위가 있을 듯합니다.

인사동에서 정독도서관을 지나 삼청동길을 걸어 삼청동 공원에 이르니 가만가만 피곤이 다가옵니다. 그래도 천천히 걸으면 괜찮습니다. 감사원 앞에서 다시 종로로 내려가는 길은 조금 지루합니다. 머리를 한껏 젖혀도 집은커녕 담장 끝도 잘 보이지 않아 마치 요새처럼 보이는 집들이 이어집니다. 곳곳에 감시카메라가 보여 누군가 내 행동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며 어서 이곳을 지나가야겠다는 생각뿐입니다. 저 너머에서 본 아기자기한 골목과는 다른 세상입니다.

구중궁궐을 둘러싸듯 묵직한 담장을 지나자 다시 사람 사는 세상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기와집 대문 위에 달린 현판을 보았습니다. 어렴풋하지만 화이실(華而實)이 틀림없습니다. 글자 뜻 그대로 보면 `보기에 화려하면서도 실속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 한옥의 모습을 보니 이 세 글자 너머의 다른 의미가 있을 듯합니다.

공자가 사건에 의탁해 대의명분을 피력한 춘추의 주석서 중 하나인 좌씨전에 기록되어 있다는 화이부실에 관한 고사를 찾아 읽었습니다.

〈중국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양처보(陽處父)라는 관리가 위(衛)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노(魯)나라의 영읍(寗邑)을 지나다 어느 객점에서 머물게 되었다. 이 객점의 주인이 양처보의 인물됨에 반하여 아내에게 작별을 고하고 양처보를 따라 나섰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객점 주인이 다시 돌아왔다.

아내가 돌아온 까닭을 묻자 그는 “그 사람은 성격이 지나치게 강경하고 편집적이었네. 게다가 겉만 화려하고 실속은 없으며 쉽게 남을 불쾌하게 만들어 원망을 많이 사더군(且華而不實,怨之所聚也). 그를 따라갔다가는 바라는 것을 얻기는커녕 머지않아 재앙을 당할 것이 두려워 그냥 돌아온 것이오.”라고 대답했다. 양처보는 이로부터 1년 뒤에 조성자(趙成子) 등과 함께 살해되었다.〉

`겉만 화려하고 실속이 없는 화이부실'의 경우를 우리는 이미 많이 겪었습니다. 부실한 공사 때문에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더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피멍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곁에는 화이부실이 넘칩니다.

그러고 보니 `화이실'이라는 현판을 내건 이집 주인은 패기가 넘치고 당당한 사람일 듯합니다. `남 보기에도 좋고 그 속마저 실하기'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화이실보다 더 이루기 어려운 경지는 `겉모습은 보잘것 없으나 그 속은 옹골찬 不華而實'의 모습일 듯합니다. 다 갖추고 있으되 스스로 그 갖춤을 드러내지 않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불화이실'의 사람들은 늘 우리 곁에서 격려하며 행복을 전합니다. 모두가 다 불화이실의 사람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그런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졸업을 하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젊은이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려봅니다. 기왕이면 `華而實'의 삶을 가꾸십시오. 지금까지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지요.

오근식 <건국대병원 홍보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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