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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에서 만난 사람 〈4〉- 삼청동길의 수류화개 그리고 추사
북촌에서 만난 사람 〈4〉- 삼청동길의 수류화개 그리고 추사
  • 의사신문
  • 승인 2014.02.17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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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이 있는 정담 〈109〉

삼청동길에서 본 현판 수류화개.
북촌이 한옥마을이라 하지만 조선시대의 전통을 간직한 양반 가옥은 몇 되지 않습니다. 정독도서관 옆길을 걷다보니 처마를 맞대고 있는 작은 한옥들은 이미 많이 사라져 옛 정취가 희미했습니다. 그나마 삼청동길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뜻밖에도 조선시대에 궁에서 사용했던 우물인 복정을 발견했습니다.

안쪽에서 들려오는 물소리가 마지막 순간까지 복정을 지키려했던 우물할머니의 목소리인 듯합니다. 더 이상 복정의 물을 마시는 사람은 없지만 바위틈에서 물은 솟아 흐릅니다. 마을의 모습은 변해도 여전히 이곳엔 지나간 세월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남아 있습니다.

복정을 뒤로하고 길을 따라 걸어 내려와 삼청동길을 만났습니다. 길 양쪽으로 아기자기한 점포들이 늘어서 있고 사람들은 좁은 보도를 따라 걷습니다. 눈을 들어 조금 멀리 보니 여기저기 멋 부린 건물들이 많이 보입니다. 한옥 처마 아래의 골목길과는 다른 모습의 북촌 풍경입니다. 좁은 보도엔 사람들이 연신 어개를 부딪치며 지나고 차들은 꼬리를 물고 있습니다.

부산함에 길들여지기 위해 잠시 멈추어 여기 저기 눈길을 주다 길 건너의 월전미술관을 보았습니다. 일전에 서예 전시회를 관람하러 잠시 들렀던 곳입니다. 그 곳 계단을 올라가면 넓지 않은 공간에 작은 연못이 있고 그 옆엔 정자와 멋진 소나무까지 있습니다. 주변의 시멘트와 대리석 건물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물이 흐르고 그 물을 바라볼 수 있는 정자가 있으니 미술관으로 들어가기 전 마음을 추스르기에는 부족하지 않은 곳입니다.

오늘은 하늘이 참 푸르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더니 머리 위로 우뚝 솟은 한옥이 눈에 가득 들어옵니다. 잘 알려진 한복업체의 사옥인데 `2013년 서울시 좋은 간판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곳이 비록 맑은 물소리와 솔바람 소리가 어울린 어느 계곡은 아니지만 제법 모양새가 잘 갖추어진 소나무까지 한 그루 있고 보니 그런대로 운치가 있습니다.

이 건물이 더욱 아름다운 이유는 거침없이 쓴 한글 주련과 처마 아래의 멋스러운 현판 때문입니다. 한껏 흥이 올라 신나게 내달린 이 현판 글씨 `水流華開(수류화개)'를 보며 이곳이 혹시 차를 마시는 곳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잠시 해 보았습니다. `물이 흐르고 꽃이 핀다'는 글자 그대로의 뜻 너머로 얼마나 깊은 또 다른 의미를 품고 있을지는 이 글을 쓴 이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추사가 초의선사에게 써주었다는 대련 글귀 `靜坐處茶半香初(정좌처다반향초) 妙用時水流花開(묘용시수류화개)에서 따온 말이라고 합니다. 추사고택에도 이 글귀가 주련으로 걸려 있다고 합니다. 고승이 오랜 수행 중의 순간적 깨달음을 시로 표현하듯 추사 역시 차를 마시다가 어느 순간 온갖 말로 다할 수 없는 생각과 느낌을 이 14자로 표현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인지 이 글귀에 대한 후대 사람들의 해석은 천차만별입니다. 어쩌면 초의는 추사의 수류화개를 이해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수류화개'는 사실 추사가 처음 쓴 말은 아닙니다. 추사보다 700여 년 전 중국 송나라 때의 시인 황산곡이 이런 시를 남겼습니다.

萬里靑天 雲起雨來(만리청천 운기우래)

空山無人 水流花開(공산무인 수류화개)

`푸른 하늘 가없어도 구름 일고 비 내리듯, 사람 없는 산에도 물 흐르고 꽃은 핀다네' 이정도의 뜻일까요. 역시 글 짧고 생각 짧은 사람의 글자 뜻풀이에 불과할 것입니다. 황산곡은 이 수류화개에 어떤 뜻을 담았을까요.

북촌골목에서 삼청동 길가에 나와 수류화개를 바라보다 생각이 길을 잃었습니다. 그저 잠시 세상의 시끄러움 접어두고 좋은 사람과 차나 한 잔 해야겠습니다.

오근식 <건국대병원 홍보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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