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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에서 만난 사람 〈3〉- 복정의 무수리와 순검들 그리고 우물할머니 정은성 씨
북촌에서 만난 사람 〈3〉- 복정의 무수리와 순검들 그리고 우물할머니 정은성 씨
  • 의사신문
  • 승인 2014.01.27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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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이 있는 정담 〈108〉

상감님이 마시던 이 우물, 복정을 굶주림과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애지중지 지켜오던 우물할머니 정은선의 이야기가 1964년 3월 17일자 경향신문에 실려 있다.
서정주와 김수영의 시를 한 편씩 읽고 옹벽 모퉁이를 돌아서니 처마가 서로 닿을 듯이 좁은 골목이 나타납니다. 천천히 걸으며 발소리를 낮춥니다. 눈을 들어 보니 골목 끝에 빨간 벽돌 굴뚝이 높이 서 있습니다.

목욕탕 굴뚝인데 어느새 서울에선 낯선 풍경이 되었습니다. 북촌을 걷다보면 사라졌다고 생각되는 모습들이 이렇게 문득문득 눈에 들어오고 사람들은 추억에 잠깁니다.

그렇게 대중목욕탕의 빨간 벽돌 굴뚝을 바라보며 골목길 끝에 이르고 보니 거기 오래된 우물이 있습니다. 복정(福井)이라 불리는 이 우물은 두레박을 사용해 땅 속 깊은 곳에서 물을 퍼 올리는 보통의 우물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우물이라고 하기 보다는 바위벽 앞에 만든 약수터 같은 모습입니다. 다만 그 앞에 잘 다듬은 화강암으로 보호벽을 쌓고 한 사람이 물을 퍼 낼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출입구를 만들어 두었습니다.

조선시대 궁에서 쓰던 물을 여기서 길어 갔으며 무수리들이 물을 길을 때 외에는 입구에 자물쇠를 채우고 순검들이 이를 지켜 일반 백성들은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우물의 물을 마시면 복이 와 병이 낫고, 아들을 낳게 된다고 믿었으니 궁에서도 이들에 일 년에 하루, 정월 대보름에는 이 물을 길어가도록 허용했습니다. 사람들은 대보름에 이 물로 밥을 지어 먹으며 한 해의 행운과 복을 기원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곳을 관리하는 사람이 따로 있지는 않고 물을 떠 가는 사람도 없는 듯합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우물 안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립니다.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물이니 물맛도 여전할 듯합니다. 그래도 선뜻 들어서서 한 모금 마셔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우물을 복원했다고는 하나 물까지 마실 수 있도록 관리가 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복정에 관한 기록을 찾아보다 경향신문 1964년 3월 17일자 기사를 발견했습니다. `우물할머니, 화동(花洞)의 정 노파, 정성 바쳐 반세기, 밀가루 수제비 먹으면서도 상감님의 물, 우물 통해 충성 다 바쳐 와' 등의 큰 글씨들이 보입니다. 50년 전의 이 기사는 `상감님이 잡숫던 우물을 지켜 물려받을 사람이 있어야지요.'로 시작됩니다.

당시 이곳 사람들이 우물할머니라 부르던 정은성 (鄭銀成) 할머니는 86세였습니다. 정 노인은 28살 때인 1906년 이 우물을 관리하던 노인이 사망하자 그 때부터 복정을 책임져왔습니다. 조선이 망한 후에도 한동안 일반인이 감히 이 우물의 물을 길어가지 못했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후엔 옛날의 임금을 생각하며 “우물을 깨끗이 잘 지켜 달라”고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을 전한 노파들이 많았었다고 기사는 전하고 있습니다.

자식 하나 없이 남편이 사망한 후 홀로 남아 우물을 지키던 정 노인은 이 우물을 사용하던 근처 사람들이 대주는 양식으로 그럭저럭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너도 나도 살아가기 팍팍한 시절에 수도가 보급되고 보니 하루 한 끼 밀가루 수제비로 겨우 연명하고 있었고 이미 여섯 달 째 병석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그녀에게 가장 큰 걱정은 죽은 뒤 이 우물을 맡아 돌봐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기사는 `그녀의 소원은 자기는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마지막으로 한번 성대한 정제를 드리고는 고요히 우물곁에서 숨지는 게 마지막 소원이라 했다'고 적고 `꽃샘 눈이 우물 주위에 쌓이는데도 나가 치우지 못한다'는 정 노인의 말로 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 후 정 노인의 걱정대로 방치되어 50여년간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우물은 최근에야 복원이 완료되었습니다. 기왕이면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다 물 한 모금 마시고 50년 전까지만 해도 이 우물을 지키려 애쓰던 노인이 있었음을 상기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근식 <건국대병원 홍보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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