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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에서 만난 사람 〈2〉- 서정주와 김수영
북촌에서 만난 사람 〈2〉- 서정주와 김수영
  • 의사신문
  • 승인 2014.01.20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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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이 있는 정담 〈107〉

북촌의 옹벽길을 아름답게 해주는 김수영의 시 `구름의 파수병(1956년 작)'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북촌은 권력을 누리는 사람들의 주거지였습니다. 지금 처마와 처마를 맞대고 있는 한옥들은 일제 강점기에 주택 건설회사가 지어 판매한 집들이라 합니다. 조선시대 넓었던 집터들이 작게 쪼개지고 전통한옥과는 다른 모습의 작은 한옥들이 대대적으로 공급이 되었다고 합니다.

골목길은 대부분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조차 불편할 만큼 좁습니다. 집의 벽이 담을 대신하고 있으니 걷다가 비라도 내린다면 처마 아래로 피해 본의 아니게 방안의 이야기까지 들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조용하던 마을에 구경꾼들이 밀려오고 이들로 인해 불편함이 작지 않음에도 기꺼이 골목길을 내 준 이곳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조용합니다. 이런 골목길에서는 겸손하게 말소리는 낮추고 발소리도 조심스럽게 걸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라도 고마움을 표해야 할 듯합니다.

정독도서관 옆 시멘트 옹벽을 따라 이어지는 아스팔트길은 삭막합니다. 그런데 이 옹벽에 누군가 독립운동가들의 그려 놓아 그 삭막함을 싹 지워버렸습니다. 일본 유학파 무정부주의자인 박열과 가네코후미코는 전통 혼례복을 입고 있고 백범 김구는 산타옷을 입고 있습니다. 이젠 하나의 예술 장르로 자리 잡고 있는 그래피티 작품입니다. 그 여운이 가시기 전에 문득 미당 서정주 시인이 말을 걸어옵니다.

그냥 가시려나. 내 시 한 수 읽으며 쉬었다 가시게. 1942년 이슬비가 내리던 어느 가을날 선운사 입구로 가는 신작로를 걷다 보니 길가 실파밭 너머에 오막살이 주막이 있더군. 이 주막에 들어가 꽃술 하나를 개봉하고 마흔 정도 되어 보이는 주모와 마셨다네. 그날 주모의 육자배기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었는데 후에 가보니 주막은 사라지고 실파밭만 남아 있더군. 1951년 빨치산 전투 중 주모가 경찰들에게 밥을 지어먹였다는 죄로 빨치산들에게 학살을 당했다고 하더군. 주막집도 불태우고. 그 때 쓴 시라네.


선운사 동구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에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후대의 많은 사람들은 `단군 이래 최고의 시인', `탁월한 상상력과 뛰어난 언어의 감수성이 빚어낸 작품의 문학적 완결성', `한국어가 감당할 수 있는 감각의 가장 아스라한 경지' 등 최고의 찬사로 미당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1942년부터 시작된 미당의 친일 작품을 발표를 두고 시인 고은은 미당 사후 `뻔뻔한 친일행위'였다고 혹독하게 비판하기도 합니다. 단군이래 최고의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도 한 때 `뻔뻔한 친일행위자'였던 미당은 스스로도 그 참담함을 지우지 못한 채 한 평생을 살았을 지도 모릅니다.

이 옹벽엔 서정주보다 6년 늦은 1921년에 태어난 김수영 시인이 1961년에 쓴 `먼 곳에서부터'와 `구름의 파수병'도 그의 손 글씨로 남아 있습니다. 김수영은 조지훈류의 서정시인으로 등장했으나 해방과 한국전쟁 그 이후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은 작품을 발표했던 시인입니다. 그래서 그에겐 영원한 청년시인이란 칭호가 붙어있습니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두리번거리며 앞으로 걷다보면 이렇게 깨알 같은 기쁨을 마주하게 되는 곳이 북촌입니다. 풍문여고 옆길을 따라 걸어 과거 경기고등학교가 있었던 정독도서관 옆 길로 접어들 때까지, 한옥은 없지만 이곳은 그래도 편안하고 한가로운 북촌입니다.

오근식 <건국대병원 홍보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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