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8 16:26 (일)
북촌에서 만난 사람 〈1〉- 가네코후미코 그리고 박열
북촌에서 만난 사람 〈1〉- 가네코후미코 그리고 박열
  • 의사신문
  • 승인 2014.01.13 10: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난이 있는 정담 〈106〉

정독도서관 옆길 옹벽의 그래피티작품. 독립운동을 하다 목숨을 바친 이들과 함께 박열과 가네코후미코를 그려 놓았다.
북촌이 그리 먼 곳도 아닌데 언젠가는 한 번 가야겠다고 생각만 여러 번. 하필이면 겨울 강추위 소식이 있던 일요일 길을 나섰습니다.

영어, 중국어, 일본어 그리고 알 수 없는 온갖 외국어를 들으며 사람들로 가득한 인사동을 지나 횡단보도를 건너고 보니 풍문여고 옆 돌담길이 소나무와 잘 어울립니다. 그렇게 시작된 주말 북촌 산책길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풍문여고 옆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니 거리공연 하는 사람들이 있고 작은 장신구 파는 사람도 보입니다. 모두 주말 북촌길가의 풍경입니다.

애초부터 어디 가서 무엇을 보고자 함이 아니었으니 그냥 걷습니다. 그러다 정독도서관 옆 담벼락으로 접어들어 이 그림을 보았습니다. 시멘트 옹벽에 유관순, 윤봉길, 이봉창, 안창호, 김구 선생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 마지막에 전통혼례복을 입은 가네코후미코와 박열이 있습니다. 가네코후미코는 1903년에 태어나 1926년까지 살았고 박열은 1902년에 태어나 1974년까지 살았다고 표시가 되어 있습니다. 한 그래피티 작가의 작품입니다.

부부로 묘사되어 있는 이 두 사람을 모르겠습니다. 집에 돌아와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방송에서도 다룬 적이 있고 박열의 고향인 문경에는 그의 기념관까지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두 사람에 대해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학교에서 독립운동가와 그들의 활동에 대해 실이 노가 되도록 듣고 배웠지만 알려주는 것만 외웠을 뿐 그 외의 사실에 대해서는 관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들려주는 것만 듣고 먹여주는 것만 먹는 것으로 만족한 결과입니다.

박열에 관해 알아보다가 70년대와 80년대에 학교에서 왜 단 한 번도 이 사람에 대해 가르치지 않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박열은 무정부주의자였고 한국전쟁 때 납북된 인물입니다. 지독한 반공 정책 가운데 시인 정지용과 같은 납북 문인들의 작품조차 자유롭게 가르치지 못했던 시절이니 학생들에게 납북된 무정부주의자를 가르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박열은 일본 유학 중 21살 때인 1922년 사상적 동지로 가네코후미코를 만나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이듬해 두 사람은 불령사라는 아나키즘 단체를 조직하고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 해 관동대지진이 일어나면서 두 사람은 검거되어 일왕 암살 모의라는 대역죄로 사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이 죄명에 대해서는 유일한 형량이 사형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곧 무기로 감형이 되었습니다.

서로 다른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던 두 사람은 옥중 결혼으로 부부가 되었지만 1926년 가네코후미코는 수감 생활 중 사망했습니다. 자살로 알려져 있지만 `옥중 의문사'했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 후 가네코후미코는 박열의 고향인 문경에 안장되었습니다.

박열은 22년 2개월을 복역하고 조국이 해방된 후 1945년 10월에 석방이 되었습니다. 2차세계대전 이전에 단일 사건으로는 가장 오랜 수감생활이었다고 합니다.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청년은 중년이 되어서야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석 달 뒤인 1946년 초 그는 아나키즘의 자유사상과 개방적 민족주의의 색채를 띤 신조선건설동맹을 결성하고 위원장으로 추대되었습니다. 백범의 뜻에 따라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발굴해 고국으로 송환하기도 했던 그는 백범의 임시정부를 법통으로 삼는 재일조선거류민단을 발족하고 초대 단장으로 추대되었습니다.

그 후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했던 박열은 1948년 단장직에서 물러나 대한민국 정부수립 축전에 초대되어 고국을 방문한 뒤 이듬해 영구귀국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1년 뒤인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된 그는 1974년 평양에서 사망해 그곳에 묻혔습니다. 우리 정부는 1989년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습니다.

박열은 민족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아닌 아나키스트의 입장에서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의 해방을 위해 몸을 바친 인물이었습니다. 가네코후미코는 박열을 만나 1년 쯤 그의 아내로, 사상적 동지로 함께 살았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남과 북에 따로 떨어져 있습니다. 우리나라 근대와 현대의 온갖 풍파를 짊어진 채 살았고 죽어서도 그 짐을 벗지 못하고 있는 부부입니다.

오근식 <건국대병원 홍보팀 과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