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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실 주변 〈106〉나는 행복한 사람
진료실 주변 〈106〉나는 행복한 사람
  • 의사신문
  • 승인 2013.10.21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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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성 <이주성비뇨기과의원장>

병원근처에서 파지(破紙)를 줍는 75세 정도의 노부부가 있다. 출근할 때나 퇴근 할 때 가끔 멀리서 보게 된다.

할아버지는 리어카를 끌고 할머니는 뒤에서 밀고 있는 모습을 본다. 더운 여름에는 그늘에서 물을 마시며 쉬는 모습도 보인다. 어느 때나 다정하고 행복하고 즐겁게 사는 것 같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항상 웃는 모습이다.

파지를 줍는 것으로 보아 살림이 넉넉해 보이지는 않지만 질투가 날 정도로 즐겁고 기쁨이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고 지내왔는데 어느 날 병원을 방문했다.

“할멈의 얼굴에 있는 기미를 없애고 싶은데요.” 기미는 있지만 빛나는 얼굴을 하고 있는, 조금은 부끄러워하는 할머니 옆에서 할아버지는 말했다.

넉넉하지 않는 살림에 할머니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애쓰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전달되었다.

손을 잡고 있는 이 노부부를 보면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행복해 보이시네요.”

“네 선생님, 가진 것은 없지만 할멈이 있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혼자는 못살죠.”

할아버지는 젊었을 때 영화배급을 하면서 세상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았단다. 영화배우나 감독들과 제작자들과 술도 많이 먹고 바람도 많이 피웠다고 한다.

회사가 부도가 나고 모든 사람이 떠났을 때 할머니의 위로가 희망이 되었다고 한다.

20살 된 청년이 정관수술을 받으러 왔다. 가끔 결혼하지 않은 청년이 정관수술을 받으러 온다.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겠다는 청년이 늘고 있다. 이성(異性)에 관심이 없는 독신(獨身)주의 청년도 있지만 이혼한 부모님을 보니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하는 비혼(非婚)주의 청년들이 늘고 있다. 비혼주의 청년들은 성관계는 마음대로 하고 싶은데 임신에 대한 책임도 지지 않기 위해 정관수술을 하는 것이다. 이들 중 80%는 복원수술을 받으러 다시 병원을 찾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생각이 바뀌는 것이다.

처음에는 20살 된 청년도 그런 줄 알았는데 2명의 자녀를 가진 아버지였다.

중학교 때 임신을 했다고 한다. 양쪽 집에선 낙태를 하고 학교 다니기를 바랐지만 이들은 가출하여 출산을 하고 둘이 살림을 차렸다. 또 임신을 하여 정관수술을 받으러 온 것이다.

택배 일을 하는데 한 달에 180만원 정도 수입이 된다고 하였다.

“아내와 아이들을 위하여 열심히 일해야겠어요.”

어린 나이지만 성자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룬 어린 부부를 보니 메마른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처럼 시원함이 있었다.

어둠이 가득한 세상에서도 이런 빛 가운데 살아가는 젊은이가 있구나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주차하는 빌딩의 주인은 수백억원의 자산가이다. 79살의 이 노인은 젊어서부터 여러 여자와 살림을 차려 배다른 자식도 여럿 있다. 당뇨로 눈도 잘 보이지 않지만 아직도 여자를 찾아다닌다. 할머니는 오래전부터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있다. 나를 볼 때마다 정력에 좋은 방법이 없냐고 물어보곤 한다. 주차장에서 일하는 관리인은 자식들 간에 재산 다툼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고 귀띔한다. 얼굴을 가까이서 보면 무언가 썩어가는 냄새가 난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보기에 좋지 않아서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나보다. 이 둘이 연합하여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될 때 아름답게 보이고 기쁨이 있다는 것을 보았다.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보다는 부부가 연합하는데 있다고 본다. 행복은 돈이나 권세나 명예가 가져다 주지 못한다.

오늘도 아내는 도시락을 싸고 있다. 몸에 좋다는 현미 김밥이다. 또 과일을 싸준다. 사과와 복숭아와 포도와 감이다. 과일은 계절마다 다르다. 나는 점심시간에 자전거를 타고 도시락을 배낭에 넣고 산으로 간다. 산에는 나만의 자리가 있다. 작은 산이지만 깊이 들어가면 지리산인지 설악산인지 모를 정도로 고요함이 있다. 아내에게 감사하며 도시락을 먹는다.

요즘처럼 힘든 때에 아내의 정성이 큰 위로가 된다. 병원을 접고 조용한 산골에서 아내와 함께 낮에는 호미로 밭을 조금 가꾸고 밤에는 서로 읽고 싶은 책들을 읽다가 깊은 잠에 빠지는 내일을 생각한다. 가끔은 외손자들이 와서 뜰에 있는 강아지들을 못살게 굴 것이다. 문(門)과 창(窓)을 다 열어 젖혀도 좋은 계절에 나는 그냥 웃는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이주성 <이주성비뇨기과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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