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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끝나지 않은 이념적 보수주의
중국, 끝나지 않은 이념적 보수주의
  • 의사신문
  • 승인 2013.10.07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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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風書風 〈25〉

중국 장가계(張家界)를 여행하기 위해 인천공항에서 출발하면 비행기가 처음 착륙하는 곳이 후난성(湖南省)의 성도(省都) 창사시(長沙市)이다.

창사는 화베이(華北)와 화난(華南)을 잇는 교통의 요지로 상강(湘江) 유역의 물산집산지이며, 중국의 곡창인 후난성의 상업 중심지이기도 하다. 중국 정부 수립이후 공업도 급속도로 발전하여 알루미늄, 유리, 방적, 동력기기, 무기 등의 공장이 세워졌고 현재는 종합공업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다. 또한 후난성은 악양루(岳陽樓)로 유명한 동정호(洞庭湖)와 뛰어난 자연경관을 지닌 장가계가 있어 관광 상품으로서도 대단한 가치를 가진 곳이다.

창사시를 관통하는 상장(湘江)의 쥐즈저우(橘子洲) 공원, 잔디로 깔끔하게 조성된 왕장팅(望江亭) 광장에는 젊은 시절의 초대형 마오쩌둥(毛澤東) 두상(頭像)이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다. 상강의 물길 사이에 있는 여의도만한 넓이의 쥐즈저우 섬 언덕에 기반의 길이가 83m, 높이가 32.5m의 철근 구조물을 만들어, 외형은 화강암 석판으로 처리하여 2009년 조각상 공사를 완료하였다. 아파트 13층 정도의 높이와 크기의 구조물이라면, 역시 외형과 규모를 중시하는 중국인다운 발상과 역사(役事)이다.

마오쩌둥은 창사 가까운 곳에서 태어났고 중국 최초의 대학인 후난 제1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쥐즈저우의 마오쩌둥 조각상은 1925년 32세의 모습인데, 4년 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상강평론(湘江評論)이란 잡지에 글을 쓰며 농민 조직결성에 힘을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또한 공산당 집권 후에도 마오쩌둥은 상강을 7번이나 수영으로 건널 정도로 고향에 대한 애정이 극진하였다. 2005년 후진타오 정부가 마오쩌둥의 업적과 유적을 업그레이드하라는 지시로 3년에 걸쳐 이 거대한 두상을 완공하게 되었다.

중국 정부가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틀을 유지하면서 가치와 효율을 중시하는 개방적 국가자본주의의 길로 들어선 지도 30여년이 지났다. 죽(竹)의 장막을 치고 폐쇄적 자력갱생을 주창했던 마오쩌둥, 시대착오적인 거대한 두상이 중앙당의 지시에 의해 세워진 상황을 어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왜 마오쩌둥인가? 비록 후난성 창사만의 일이긴 하지만 젊은 세대에게 희미해진 빅브라더의 기억을 되살려 놓고 있음을… 하기야 중국의 중심인 베이징의 텐안먼(天安門) 광장에서도 마오쩌둥의 초상은 상징처럼 걸려있다.

통일 중국이 통치 기반을 안정시킨 1950년대에 지도층 내부에서 진보적 발전 시각이 나타났으며 보수적 이념주의자들과 대립했다. 국민적 소통을 이루려는 사회민주주의를 추구하고, 경제적 가치와 효율성, 농업과 공업의 균형적 발전 개념이 그것이다. 마오쩌둥을 비롯한 보수 공산당 지도부도 백화제방, 백가쟁명(百花齊放, 百家爭鳴) 운동을 실시하여, 인민 대중들에게 언로를 확대하고 공산당에 대한 자유로운 비판도 감내하겠다는 의지도 있었다. 그러나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도 높은 비판이 전문 지식인들에 의해 제기되자 1957년 6월, 공산당은 이른 바 `반우파(反右派) 투쟁'을 시작하였으며 결국 사회적 합의라는 민주적 토론의 장은 종언을 고하였다.

수백만의 아사자와 함께 참담한 결과로 끝난 대약진 운동, 조반파(造反派)에 의해 소위 주자파(走資派)로 알려진 류사오치(劉少奇)와 덩샤오핑(鄧小平)을 숙청하고 대륙 전체를 혼란 속에 빠뜨렸던 1966년의 문화대혁명. 마오쩌둥의 사후, 덩샤오핑의 진보적 실용주의는 마오쩌둥의 실패를 거울삼아 개방적 실용 노선으로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이념적 과도기의 혼란과 내부적 반발을 피하려 했음일까, 아니면 사회주의자로서 평생을 지녀온 공산당의 정체성을 버릴 수 없었음일까. 덩샤오핑은 스탈린을 격하시킨 후루시쵸프의 전철을 따르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이념적 변혁을 추진하며 인(仁)과 예(禮)를 중시했던 공자를 죽였지만, 덩샤오핑은 세대간 기능적 전문성을 연결시키면서 무덤 속의 공자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아마도 덩샤오핑은 공자와 마찬가지로 마오쩌둥의 행적이나 사상도 역사적 단절이 인위적이 아니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과 주위의 진보적 사회주의자들을 제거하려한 마오쩌둥, 덩샤오핑은 역사의 사실 그대로를 개인적인 평가 없이 유지하였다.

국공 내전에서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고 국민당 정부를 전복시킨 점,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한 점, 중국의 독립과 주권을 회복시킨 점 등에 있어서 마오쩌둥은 근대 중국에 대단한 기여를 했다. 그러나 집권 후 마오의 두 가지 개혁정책인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은 분명 잘못된 것이었고, 끔찍한 결과를 초래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는 지금도 비판적인 여론이다. 중국을 방문했던 노무현이 마오쩌둥을 제일 존경한다고 떠벌렸으니 부끄러운 쪽은 한국, 중국 모두가 아니었을까?

보도에 의하면 국민당 총통이었던 장제스(蔣介石)의 항일 업적도 비교적 객관적 시각으로 교과서에 편집되어 있으며 저장성 펑화(奉化)에 있는 그의 생가도 잘 보존하고 있다고 전한다. 비록 통일을 위해 타이완 정부를 염두에 두고 있다하더라도 마오쩌둥 이후의 중국은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역사적 단절을 원하지 않고 있는 듯 보인다.

경제발전은 중국인들의 기존 공산주의 의식 관념 중 많은 것을 변화시켰지만, 중국 지도층은 여전히 계획경제와 유일 공산당 체제를 고수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에서 거의 사라진 정치적 사자성어(四字成語)를 만들어 대내외적 지침으로 선전하고, 중앙 권력에 벗어나는 독립적인 지방자치는 아직은 거리가 먼 현실이다. 티베트와 신장 위구르 지역의 민족 자치정부를 허용하지 않으며, 센카쿠 열도, 남사군도, 서사군도 등 자원과 영토의 팽창 정책 역시 진행 중이다. 내부적으로도 시장 경제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간섭과 견제가 작용하며 이는 관료들의 부정과 부패, 격심한 빈부차이로 이어진다.

중국은 급속한 경제 발전의 이면에 인민들의 심각한 부의 양극화, 도시와 농촌간의 소득 격차, 환경오염, 세대간의 갈등, 정치 관료들의 부정과 부패, 민주주의의 요구 역시 가속화되고 있다. 중국 정부가 바라는 바와는 달리, 마오쩌둥에 대한 복고주의와 그와는 정반대편에 있는 자유민주주의가 서로 다른 불만 계층들에 의해 수면 하에서 잠재적 폭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마오쩌둥의 이데올로기라면 오늘날의 명목뿐인 공산당이 인민의 주적(主敵)이 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아이러니와, 전문 지식인들의 자유민주주의적 요구가 양면에서 중국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시대적 변화의 갈림길에서 국가자본주의와 보수적 사회주의의 갈등의 중심에 자리하는 불평등과 자유의 억압, 중국은 여전히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홍수철을 앞두고 상강의 물결은 아직은 푸르고 평온하다. 쥐즈저우 공원에 산처럼 우뚝 솟아있는 마오쩌둥의 조각상, 중국 정부가 항일 전쟁의 승리와 정치적 통일을 이룩한 마오쩌둥의 기념사업으로 두상을 제작하였겠지만,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 지도층이 원하는 인위적 사회와 역사관이며, 정치경제적으로 착취와 불평등을 의식하고 있는 노동자와 농민, 양심과 표현의 자유를 요구하는 전문가와 지식인들이다.

시진핑 정권은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을 것인가? 참담하게 실패한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룬 덩샤오핑의 실용주의적 이데올로기 이론, 역사는 정반합의 진보로 발전하지만 항상 과거와는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반복을 거듭한다. 다만 역사적 교훈을 살리지 못하는 사회는 과거보다 더 잔혹한 혼란과 시련의 시대를 맞이할 것이다.

박송훈 <대한공공의학회 대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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