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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마리 르클레르 〈바이올린과 통주저음위한 소나타〉 D장조 작품번호 9
장 마리 르클레르 〈바이올린과 통주저음위한 소나타〉 D장조 작품번호 9
  • 의사신문
  • 승인 2013.09.30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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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이야기 〈237〉

1764년 10월 23일 르클레르는 파리 자택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등에 칼을 맞았으나, 당시 결정적인 증거가 없어서 범인을 밝혀내지는 못했다. 경찰은 유력한 용의자로 그의 조카와 아내를 지목하였다.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조카는 당시 귀족의 총애를 받던 르클레르에게 자신도 참여하게 해달라고 여러 번 요구했으나 거절을 당해 앙심을 품고 있었고, 당시 별거 중이었던 아내도 르클레르에게 조카를 취직시켜달라는 압력을 계속 넣고 있었던 중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정황들은 있으나 아직까지도 진범은 밝혀지지 않은 채 미궁 속에 빠져 있다.

프랑스 리옹에서 태어난 르클레르는 루앙의 오페라극장에서 무용수로 뛰다 29살에 이탈리아로 건너가 토리노에서 무용수와 발레교사로 지내다 우연히 바이올린 연주자 지오반니 소미스에게 바이올린 배우면서 연주자로 전향했다.

재능이 뛰어나 바이올린을 배운지 얼마 지나지 않아 파리에서 연주자로 성공을 거두었고 30대 중반에 벌써 궁정 음악가가 되었다. 당시 코렐리, 비발디를 비롯한 이탈리아 음악이 프랑스에 전파되었는데, 르클레르는 전통 이탈리아양식에 프랑스의 부드러운 선율과 명확한 형식, 춤곡 등을 접목하여 우아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이탈리아, 독일, 영국, 네덜란드를 수시로 방문했던 르클레르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음악적 취향을 배울 수 있었다. 그의 고유한 프랑스 취향에 여러 나라들의 취향을 혼합시켜 자신의 음악적 가치를 한층 더 높였다. 한편 그의 음악적 어휘와 기법은 동시대의 로카텔리, 제미니아니, 헨델과 같은 위대한 작곡가들의 음악과 교류하면서 강화되었다. 이러한 결과, 선율과 화성적인 독창성에서 그의 동료들과는 구별되면서 다른 어법으로 이어졌다.

다양한 선율들을 무한하게 노래하는 특성과 리듬들의 활력은 무용수로서 그의 배경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작품들에서 화음 구조들의 밀도와 심도는 자신의 음악이 독일과 영국의 영향들을 얼마나 훌륭하게 흡수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알력 다툼으로 네덜란드로 건너가 활동하다가 훗날 다시 파리로 돌아온 후에는 귀족극장 음악감독을 맡게 된다.

프랑스 바이올린악파의 시조라는 평가를 받는 만큼 그가 남긴 작품은 대부분 바이올린 연주곡이다. 대표적으로 5권의 바이올린과 통주저음위한 소나타, 2개의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집, 2개의 바이올린협주곡 등이 있다. ‘르클레르는 미를 창조하기 위해 그 어떤 것도 모방하지 않고 자기 고유의 새로움을 보여준 인물이다.’라고 극찬한 시인 세레 드르외의 운문에서 표현된 것처럼 그의 고결성은 프랑스음악계에서 인정받게 된다.

그의 사후에는 당시 음악적 취향이 바로크 기법에 등을 돌리면서 영감이 풍부하고 명쾌하며 기교적인 그의 모든 작품들은 무시당하게 되었다. 단지 장-밥티스트 카르티에의 바이올린 악파 그리고 훨씬 나중에 독일 페르디난트 다비트의 소나타 모음집에 포함되었던 적은 수의 소나타와 춤곡들만이 일부 살아남아 간간이 인기를 얻으며 유지되었다.

최근 18세기 음악에 대한 관심이 재개되면서 르클레르를 영감적인 창조자로 재발견하게 되었다. 많은 학자들은 작곡가로서의 그의 재능들과 기술에 관련된 특성들을 상기하고 르클레르가 유럽 음악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었음을 인정하였고 그의 인상적인 작품에 대해 찬사를 많이 하게 되었다.

그의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들은 네 개의 헌정 작품들로 구성되었는데 그의 경력에서 중요한 단계들을 보여준다. 1723년에 작곡된 제1권은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그를 도왔던 자본가이자 후원자 보니에에게 헌정되었다. 1728년 콩세르 스피리튀엘에서 데뷔이후 보니에가 죽은 후에도 계속 자신을 지원했던 보니에의 아들에게 소나타 제2권을 헌정했다.

당시 그는 두 번의 짧은 여행을 다녀왔는데 그중 독일에서 로카텔리와 알게 된다. 그 후 왕의 수석 악장 직책을 맡았던 1734년 그는 루이 15세에게 자신의 세 번째 모음집, 작품번호 5번을 헌정했다. 1738년 출판된 소나타 제4권 작품번호 9번은 오렌지 공주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바쳐졌다. 그녀는 네덜란드의 궁전으로 르클레르를 데려왔던 인물이었다. 이 마지막 4권은 암스테르담에서 그와 다시 만났을 것으로 생각되는 로카텔리의 영향력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들을만한 음반: 파비오 비온디(바이올린), 리날도 알렉산드리니(하프시코드)(Arcana, 1992); 사이몬 스탠더지(바이올린), 니콜라스 펄(하프시코드)(Channel, 2007); 프랑소와 페르난데즈(바이올린), 피에르 앙티에(하프시코드)(Auvidis Astr<&25062>e, 1998)

오재원 <한양대구리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 이 클래식이야기 전편은 오재원 작 `필하모니아의 사계'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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