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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실 주변 〈102〉소풍처럼
진료실 주변 〈102〉소풍처럼
  • 의사신문
  • 승인 2013.09.16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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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성 <이주성비뇨기과의원장>

한 곳에서 개업한 지가 올해로 27년째가 된다.

처음 개업 당시 이곳 부평에는 높은 건물이 없어서 창문을 열면 앞산이 눈앞에 다가왔다. 다니는 차들도 많지 않아 로터리에는 신호등도 없었다.

길가에는 과일을 파는 사람들로 가득해 어느 시골의 장터를 보는 듯 정겨움이 있었다. 아파트가 들어서고 고층건물이 들어서면서 앞산은 보이지 않게 되고 이곳저곳에 신호등이 설치되었다.

큰 마트들이 들어서며 길가의 과일 장사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왕복 2차선이었던 경인고속도로는 왕복 8차선으로 확장되었고 그것도 모자라 제2, 제3경인고속도로가 만들어졌다.

국민소득 1000불이었던 시절보다 도시는 점점 규격화되고 복잡해지면서 사람들은 분주해지고 경쟁적으로 되어 갔다.

몸과 마음이 정지할 줄 모르게 되어 신호등 앞에서 조금만 지체하면 빵빵 소리를 낸다.

창밖의 경치를 보며 운치 있게 움직였던 완행열차는 이 시대에 불필요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인터넷이 조금만 느려도 참지 못하고 새로운 핸드폰이 나오면 바꾸어야 직성이 풀린다.

환자들도 개업초기에는 조용하고 의사 지시를 잘 들었었는데 지금은 조금만 기다리게 하면 참지를 못한다.

문명의 흐름 속에서 사람들은 여유와 안식의 시간을 잊어버리고 달려간다. 세상문화의 큰 흐름 속에 속하지 않으면 두려움을 느낀다. 나도 그 흐름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왔다.

책임감과 체면과 두려움으로 급행열차를 탄 채 달려온 느낌이다.

“왜 우리는 성공하려고 그처럼 필사적으로 서두르며, 그처럼 무모하게 일을 추진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이 자기의 또래들과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 그가 그들과는 다른 고수의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듣는 음악에 맞추어 걸어가도록 내버려두라. 그 북소리의 음률이 어떠하든, 또 그 소리가 얼마나 먼 곳에서 들리든 말이다.

그가 꼭 사과나무나 떡갈나무와 같은 속도로 성숙해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그가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헨리 데이빗 소로우)

오늘은 개업초기부터 단골인 95세의 할아버지가 오셨다.

나병환자로 소록도에서 인천으로 강제 이주하신 분이다. 국가에서 주는 얼마의 돈과 동네 공동화장실을 청소하면서 받는 돈으로 평생을 가난하게 사셨다.

병원에 오실 때마다 빵과 과자를 사오시며 술과 담배를 하지 않으니 심심하면 먹으라고 사오시고, 나의 여름 휴가비를 줄 만큼 마음은 언제나 부요하게 사는 분이시다.

나는 이 분이 어떤 고수의 북소리를 항상 듣고 사신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다면 이 세상에서 이렇게 자유와 평강으로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는 원장님을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아요.모든 기력이 쇠한 느낌이네요. 모든 것은 변하고 지나가네요. 모든 것이… 나는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다 갑니다. 병원에 오지 않으면 천국에 간 줄 아세요.”

농담으로 하시는 말이 아닌지를 알고 있다. 이 말을 마지막으로 하시고자 마지막 발걸음을 하신 것이다. 나는 웃으면서 손을 그의 등에 가볍게 얹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귀천)

이 세상이 소풍이 되려면 급행열차에서 뛰어내리고 완행열차로 갈아타야 한다.

이제 누구의 삶도 흉내 내지 않고 나만의 아름다운 소풍의 삶을 살아야겠다.

이주성 <이주성비뇨기과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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