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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실 주변 〈101〉낙엽이 질 때
진료실 주변 〈101〉낙엽이 질 때
  • 의사신문
  • 승인 2013.09.09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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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성 <이주성비뇨기과의원장>


[편집자 주] 의사신문의 인기 칼럼이었던 `진료실 주변'이 다시 시작됩니다. 지난 2009년 1월 `바보온달과 평강공주'를 끝으로 2년간 100회 연재를 마쳤던 이주성 원장〈인천 이주성비뇨기과〉이 새로운 각오로 연재를 시작합니다. 유려한 필체로 진료실 주변을 집필, 전국 독자들의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던 이주성 원장의 새로운 시각이 담긴 `진료실 주변'의 열독을 권합니다.
(지난 '진료실 주변' 보기: http://www.doctorstimes.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39)
 

이주성 원장
아무리 떠밀어도 가지 않던 더위가 조금 물러선 느낌이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 잠자기가 편하다. 끝까지 고집 부리며 오지 않겠다던 가을이 계절의 순서 앞에 무릎을 꿇은 것 같다. 계절의 순서에는 변함이 없다. 새순이 돋고 녹음이 지고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지고 앙상한 가지가 겨울을 맞이한다. 우주에 있는 만물은 잉태와 소멸을 반복한다. 조금 있으면 가을이 오고 낙엽이 질 것이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나가고 또 한 살을 먹는다.

유난스럽게 계절의 변화에 민감한 나는 어떤 문화나 사건보다도 자연의 변화에 정서적으로 깊은 영향을 받는다.

2012년 2월 눈이 많이 온 몹시 추운 새벽에 눈을 맞은 앙상한 나무들이 바람에 떨고 있었다. 문득 더 늦기 전에 인생의 후반전을 좀 더 의미 있게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평생을 고민했고 지금도 고민하고 있는 성(sex)에 대한 글을 쓰고 강의를 하고 책을 내겠다는 결심을 했다. 급히 홈페이지를 만들고 성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책을 보고 쓴 것이 아니라 내 경험과 환자를 치료하면서 느낀 소감들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홈페이지에 들어와 글들을 보아 주었고 우연한 기회에 신문에 글을 연재하기도 했다. 우연한 기회에 강의를 하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전자책을 포함해서 4권의 책을 내었다. 지금은 한 달에 4번 정도 결혼을 앞둔 청년들(결혼 예비학교)이나 결혼한 부부(부부학교)에게 강의를 한다. 병원을 운영하고 글을 쓰고 강의를 준비하는데 바쁘다.

10여 년 전 마음을 먹고 시작했던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신기하다. 우연이라고 생각되기도 하지만 우리가 구하고 생각하며 행동할 때 어떤 큰 힘이 동행하는 것을 느낀다. “희망은 땅 위의 길과도 같다. 원래 땅 위의 길이란 없다.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길이 되는 것이다”(루신)

나이 50까지는 그냥 열심히 살았고 그 후 10여년은 방향을 갖고 열심히 살아온 느낌이다.

방향을 잡고 걸을 때 곧고 아름다운 길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계절이 흘러 지나간 것이 아니라 내 몸에 들어와 박혔다. 얼굴에는 세월의 강이 깊게 패였고 머리에는 서리가 내렸다. 눈은 혼탁해져서 환자 볼 때와 수술할 때 쓰는 안경이 다르고 운전할 때도 다른 안경을 쓴다. 무엇보다 체력이 달린다. 철인 3종 경기를 할 때인 40대 후반 까지는 나 스스로도 철인인 줄 알았다. 지치지 않고 회복도 빨랐다. 이제는 고철(古鐵)이 되었음을 느낀다. 쉽게 지치고 회복도 더디다. 젊은이들과 수영을 하다보면 어깨에 피곤이 빨리 온다. 이제는 인생의 종반전을 준비할 때가 온 것 같다. 짧은 가을이 지나면 곧 낙엽이 질 것이다.

낙엽이 지기 전에 아름다운 단풍을 선물하는 나무처럼, 연극의 마지막 장을 열연하여 많은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는 노배우처럼 인생의 종반전을 우아하게 보내고 후배들과 자녀들에게 무대를 내어주고 내려오고 싶다.

앙상한 가지에 붕대로 감고 찬바람을 맞는 인생의 연장전인 황혼을 준비하기 위해서 검소한 겨울옷도 준비해야겠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봄 소풍의 영상이 스쳐지나간다. 손에 손을 맞잡고 노래를 부르면서 칠성 사이다와 김밥 도시락을 메고 오솔길을 걸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우리의 본향이 아름다운 꽃이 가득한 꽃 대궐임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오늘을 기쁘고 힘차게 살아내야 한다.

이주성 <이주성비뇨기과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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