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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오기 전에
가을이 오기 전에
  • 의사신문
  • 승인 2013.09.02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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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風書風 〈24〉

유난히도 더운 여름이다. 지나간 겨울도 몹시 춥고 길더니 봄은 있는 듯 없는 듯 떠나고, 6월 초순부터 30도 이상의 찌는 듯한 열기만 거리에 남겨 놓았다. 대구를 비롯한 남부 지역은 장마도 사라졌다.

매년 한낮 최고 기온의 평균치를 보면, 다른 도시에 비해 대구는 선두권에서 한 번도 밀려난 적이 없다. 두 달 이상 고온이 지속되는 마른장마와 가뭄, 책 한 권 읽기도 힘든 올여름 같은 무더위에는 집안에 있기도 나가기도 힘든 실정이다.

매스컴은 지구 온난화에 따른 기후변화라고 말들을 하지만 작년 겨울의 혹독한 추위와 매서운 바람을 생각하면, 나 같은 기후생태학적 문외한(門外漢)의 안목으로서는 어쩐지 앞뒤가 맞지 않는 느낌이다. 하기야 유명했던 대구 사과의 로고(logo)가 사라진지도 이미 오래되었으며, 사과 재배지가 충주 이북으로 북상하고, 그것도 모자라 칠성동(七星洞)의 청과물 시장에는 고산지대의 명품 사과가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다.

점진적인 아열대성 기후변화라면 건기도 아닌 여름에 마른장마는 또 뭔가? 낙동강과 동, 남쪽 근해에는 녹조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고, 해마다 장마와 태풍으로 인한 수해로 고통을 받아왔던 제주도는 지금 심각한 물부족 사태에 직면하고 있다. 8월이면 찾아오던 태풍도 올해는 중국으로 발길을 돌리고, 슈퍼컴퓨터로 무장한 기상대 예보조차 왜 이리 자주 틀리는지.. 더욱이 원전 비리와 고장으로 전력수급이 어려워진 국가적 위기상황, 관심경보가 발령되면 더위에 지친 사람들은 짜증스럽고 볼멘소리가 절로 나온다.

미디어의 보도가 그러하듯이, 만나는 사람마다 대화의 주제는 폭염과 가뭄에 관한 것이다. 행여 소나기라도 기다렸던 사람들의 기대는 연일 무너지고 휴가는 어디로 갈 것인가, 휴가지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이제는 더위를 피해 탈출할 궁리에만 열중한다.

또한 예년 같지 않은 폭염에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흉흉하다. 등락이 심한 주식 시장이 그렇고, 사소한 교통사고나 폭행에서부터 납치와 살인의 강력 사건까지, 시선을 끌만한 보도가 하루에도 몇 차례 끊이질 않는다. 복지 예산과 관련된 세수확대(稅收擴大)와 국정원 정치 개입 문제로 정치권은 여름 내내 바람 잘 날 없고, 집단 자위권이래나 뭐래나 후쿠시마 원전의 오염수와 더불어 일본의 상황도 예사롭지가 않다. 시위대 무력 진압으로 혼란스러운 이집트 사회와 화학무기 살포로 인한 시리아의 참상… 올여름은 이렇게 지나가는가? 무엇 하나 시원한 소식도 없이 잠 못 이루는 열대야는 갈증과 불편을 더해만 간다.

작년의 여름은 어땠을까, 그리고 재작년은? 돌이켜보면 별로 생각나는 게 없다. 인간의 기억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다. 특별한 사건과 연관되지 않는다면 더위나 추위로 고생했던 기억의 흔적들은 쉽게도 지워진다. 심지어 이기적이기조차 하다. 올해가 더 덥고 더 추우며, 현재의 고통이 예전보다 더 견디기 힘들고, 나의 하루가 남들에 비해 훨씬 힘들다는 것..

누구에게나 생활적 체험과 기억은 현실적 직관이며, 객관적이 아니라 명백한 주관적 사실이다. 냉해로 서늘했던 이십여 년 전 독특한 여름의 행태는 모두들 잊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예외적인 경우의 공통 기억일 뿐이다. 특별한 사건과 경험이 겹치지만 않는다면 반복되는 계절의 일상적 과거 기억은 사라지고 모든 것은 현재로만, 오로지 현실의 상황으로만 존재한다. 그러기에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루하루의 여름이 지루하고 답답하게만 느껴지고, 언제나 그랬듯이 입을 모아 더위를 푸념한다.

요즘은 부쩍 산행 시간이 늘었고, 주로 늦은 오후에 산행을 한다. 여름 산을 오르는 것은 무척 힘들다. 온 몸이 땀에 젖고 날벌레나 모기에 물리는 경우도 다반사다. 간혹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지만, 여름 산행의 묘미는 능선의 시원한 숲 그늘 쉼터가 제공한다. 등산객이 드문 평일의 산길을 걷다보면 이래저래 일에 대한 욕심이 솟아나고, 떨쳐 버릴 수 없는 나이든 자의 무능함과 공직 은퇴자의 자존심이 뼛속 깊이 스며든다.

몇 달이나마 지난날을 돌이켜 보며 쉬겠다고 결심한 휴식 시간이 얼마나 오래 갈는지는 모르겠지만, 쉼터 통나무 그루터기에 앉으면 소나무 숲을 지나는 바람결에 무심한 세월, 비울 것도 없는 마음조차도 흘려보낸다. `야! 난 3년 쉬었어, 겨우 몇 달 가지고 그래.' 불현듯 경주 모 선배님의 목소리가 귓전을 스친다. 위로인가? 충고인가?

오늘은 오랜만에 비가 내렸고 저녁은 한결 시원하다. 매섭게 추웠던 겨울이 지나갔던 것처럼 머지않아 혹서(酷暑)의 여름도 물러가리라. 도심에는 한낮의 열기가 여전하지만, 산등성이 떡갈나무 잎사귀들은 조금씩 청정한 신록의 빛깔을 잃어가면서 소리 없이 가을을 준비한다. 유난히도 길고 뜨겁게 느껴지는 여름의 막바지, 한 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가을이 오기 전에, 무언가 지난 일들을 정리하고 평온한 일상의 거리를 걷고 싶다. 그래도 아직은 위선적인 프로페셔널에 젖지 않으려는 작은 자존심이나마 지키고 있다. 아무런 부담 없이 과거를 돌아보고 다시금 일어서려면, 무더위를 떨쳐버리고 생각의 편안함과 정결함부터 지니리라 다짐을 해보곤 한다.

내가 좋아하는 최정산(最頂山) 산행 길에 마주치는 능선의 맑고 푸른 하늘과 새털구름, 올해의 여름도 청정한 하늘 호수의 구름처럼 그렇게 하릴없이 지나가고 있다. 내일은 소박한 정성으로 음식을 준비하여 요양병원 어머님을 찾아뵈어야겠다.

박송훈 <대한공공의학회 대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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