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8 16:26 (일)
만병통치약이 지배하는 사회
만병통치약이 지배하는 사회
  • 의사신문
  • 승인 2013.08.05 09: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世風書風〈23〉

일전에 부름이 있어 누님 집을 찾았더니, 건강을 물어보며 고농도 비타민-C를 한 곽(400정)이나 내놓으신다. 당뇨나 고혈압, 고지혈증 등 성인병에 좋다면서 식후에 반드시 챙겨 먹으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조카가 홀로 계신 어머니를 위해 구입했지만 정작 당신은 위장이 안 좋아 복용할 수 없으니, 아마도 경증 대사성 질환이 있는 동생이 무척이나 신경이 쓰이셨나보다. 그러나 누님이 모르는 게 있다. 내가 오랫동안의 오메가-3 와 비타민-C, 홍삼 복용을 줄이거나 끊고 난 후 오히려 임상 검사의 결과가 개선되었다는 사실이다.

부작용에 대한 특별한 주의 표시가 없는 건강식품의 특성상, 대중 미디어를 통한 자유로운 홍보가 가능하고 약국이나 편의점에서 쉽게 구입하여 복용할 수 있다는 편의성은, 까다로운 처방약을 대신하며 다중(多衆)에게 결국은 먹는 게 안 먹는 것보다 낫다는 식의 건강식품 의존성과 과소비를 조장한다. 이러한 의존성과 과소비는 상당한 노력과 시간, 감정적 절제를 요구하는 다이어트와 운동, 생활 습관의 정상적인 교정을 방해할 수도 있다.

질병을 인지해야 하는 처방약은 왠지 두렵고, 일상의 습성을 바꾸기는 더욱 힘들고, 차라리 건강식품에 눈과 귀가 쏠리는 인간의 심리가 본성적으로 작용한다. 인기 건강식품의 선전 문구를 보면 대부분 한 가지 질환의 주된 효능이 아니라 그야말로 온갖 성인병의 만병통치약이다. 내 자신부터 식후에 무조건 한 알씩 삼키지 않으면 왠지 불안해지는 건강식품의 홍보 효과와 함께, 또 다른 곳에 내재해 있는 한국인들의 한의약 음식에 대한 전통적인 믿음과 맹신도 이러한 건강식품 만능의 상황을 초래하는 건지도 모른다.

악성 고혈압으로 인해 신장의 기능이 파괴되어 신장을 이식한 환자가, 야생 식물로 만든 차를 마시고 고혈압을 극복했다는 일화를 TV에서 본 적이 있다. 다큐멘터리의 끝머리에서는 한의대 교수가 동의보감을 예로 들며 치료약으로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한방식물학(韓方植物學)의 약리를 설명했다. 아스피린을 포함하여 식물에서 개발된 약들도 많고, 내과 해리슨 텍스트에서도 대체의학이 소개되는 판국이니 굳이 이런 얘기에 토를 달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하나만 짚고 넘어 가자.

고혈압인 사람의 주된 문제는 신장 어딘가에 있다는 많은 증거가 있다. 건강한 신장을 이식 받은 환자가 고혈압에서 회복될 수 있다는 가능성, 수술 후 환자가 처방약을 복용하고 일상의 생활 습관과 운동 조절을 해왔다는 사실은 손톱만큼도 다루지 않는다. 야생 식물의 효능에만 치중하는 선전 효과, 미디어의 역할이 사실에 대한 공정성과 배경을 무시하고 치유 과정의 일정 부분만을 강조한다면, 식품의 기능을 뛰어 넘는 만병통치의 치료적 효능은 미디어의 홍보가 창출하는 것이 아닐까? 아이러니하게도 기능식품의 부작용 역시 나날이 증가 추세를 보인다.

대부분 건강식품의 광고는 복잡하고 까다로운 과학적 실험 논증과 통계학의 비교 절차는 생략하고, 부분적 결과로 나타나는 효과와 오직 성공 사례에만 집중한다. 아침에 까치 소리를 들으면 반가운 손님이 찾아온다는 얘기대로라면 까치가 흔한 도시 외곽과 시골은 방문객으로 넘치고, 까마귀 울음을 불길하게 여기는 옛사람의 관념이 적중한다면 산등성이를 산행하는 등산객들의 씨가 마를 것이다.

건강식품의 유행과 과소비는 사회 구성원의 의식을 지배하고 오랫동안 내재해 온 터부 관념 역시 한 몫을 한다. 전통적으로 음식의 효능에 대해 세부적인 것까지 관여해왔던 우리의 전통적 습성이 옳다면, 과거나 현재 한국인의 평균수명이나 건강 상태가 선진국과 비교가 되겠는가? 건강식품이 통계적인 역학을 제시하거나 정확한 과학적 논증을 할 수 없다면, 대중의 사회적 관념에 일방적으로 호소하는 방식 대신에 약제 효능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 객관적이고 충분한 사례를 들어야 한다. 시중에 나도는 건강식품의 65% 이상이 C급 이하의 부적합 판단을 받았지만, 대박을 노리는 건강식품의 시장에는 이미 수백 가지의 상품들이 수면 하에서 호시탐탐 대기 중이다.

치료 혹은 예방 약제를 복용 중이라는 믿음은 심리적인 안정성을 제공한다. 플라시보 효과가 약효의 믿음에 대한 심리적 안정성에서 비롯됨은 많은 임상 연구결과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2006년 레바논 전쟁 중에 헤즈볼라는 이스라엘 북부의 갈릴리 지역에 무차별로 로켓탄을 쏘았다. 지역 주민들은 예고 없이 날아드는 포탄의 위험 속에서 집을 지킬 방법은 없었다.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역을 떠나든가 하루 종일 방공호에서 생활하거나… 인터뷰한 주민 여성들의 70% 이상이 집을 지키고, 포탄의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매일 수십 번도 넘게 유대 찬송가를 불렀다한다. 찬송가를 부른 여성들은 그러지 않은 여성들에 비해 밤중에 상대적으로 편히 잠들었고 집중하는 데도 어려움이 없었다. 또한 괜스레 분노를 터뜨리지도 않았고, 불안감으로 인한 긴장감에 크게 시달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찬송가적 기대와는 달리 집은 무차별적인 카오스의 확률로 파괴되었다. 의학적 자료에 근거하지 않는 플라시보 효과와 심리적 안정성, 버틸 수 있는 한계는 오래 가지 않는다. 집의 파괴는 날아드는 로켓탄의 발사 횟수와 낙하지점의 위치 확률로만 존재할 뿐이다.

인간의 생명에 대해 현대 문명사회가 이룩한 공헌 중에서 가장 획기적인 발전을 이룬 것이라면, 만성적인 식량부족에서 탈피하고 전염성 질환의 많은 부분을 극복했으며 생명에 대한 과학적 인식과 인권 철학의 향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반면에 물질적인 풍요에 따른 성인병의 발병율과 유병율이 증가하고, 일반인들의 건강과 수명에 대한 관심도 높아져 왔다. 의료복지는 시대적 흐름이며 현실이다. 의학의 발전은 눈부신 업적을 이룩하였지만 미래의 역사적 안목으로 본다면 이제 겨우 초보 단계에 진입한 것일 수도 있다.

기아와 전염병, 이웃과의 전쟁으로 생존의 문제에만 급급했던 전통사회와는 달리, 오늘날에는 건강 유지와 노화 방지에 대한 욕구가 중요한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세계적으로 건강식품의 시장은 날이 갈수록 확대되고 규모 역시 대단한 성장세를 보인다. 우리나라도 2012년 건강식품 생산액만 1조 5000억 원에 이르고 비공식 자료를 포함하면 4조 원을 넘어섰다고 한다.

보수적 견지에서 보면 이러한 폭발적인 증가세가 건강식품의 남용과 과소비로 비칠 수도 있지만,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중심으로 하는 진보적 가치를 누가 함부로 비난할 수 있으랴. 다만 건강식품이란 명분으로, 의약품이 아니란 이유로, 의료복지의 틈새시장을 자유롭게 활보하며 약제의 부작용과 생활 습관의 교정을 무시한 채 근거 없는 상품 홍보의 폭격을 마냥 두고 볼 수만은 없지 않는가.

건강식품 시장의 사이비 과학과 무절제한 광고, 이로 인한 다중의 맹신을 더 이상 방치할 수는 없다. 정부는 국민 건강의 악영향을 고려하여 건강식품의 한계를 정하고, 강력한 규제 조치를 시행해야 한다. 만병통치약이 지배하는 사회, 일정 부분 과학의 연역적 반증주의와 합리성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식품의 한계를 넘어서는 홍보와 선전 작태에 대해 의료계가 과학적 검증의 예리한 칼날로 맞서지 않는다면, 결과에 대한 사회적 책임과 비난에서 정부뿐만 아니라 우리 의료계 역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박송훈 <대한공공의학회 대의원>

*건강식품은 건강기능식품과 건강보조식품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세간의 인식 상, 이 부분의 경계가 모호하므로 여기서는 구분 없이 건강식품으로 표현하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