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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지마의 추억
사쿠라지마의 추억
  • 의사신문
  • 승인 2013.04.29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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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風書風〈19〉

가고시마(鹿兒島) 시가지가 온통 벚꽃 축제로 한창일 즈음에도, 정작 사쿠라지마(櫻島, 벚꽃섬)*에서는 벚꽃을 구경하기가 힘들다. 1914년에 일어난 화산의 대폭발 이후에 대부분의 벚나무가 섬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산자락에 펼쳐진 소나무 숲(黑松)과 초원의 목장은 지난 날 화려했던 벚꽃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5월이면 사쿠라지마 산기슭의 구릉지를 휘감는 곱디고운 철쭉의 붉은 빛깔로 봄날의 말미를 장식한다.

미나미다케(南岳) 쇼와 화구에서 간헐적 폭발과 함께 분출되는 화산재의 토양으로 세상에서 가장 큰 무와 가장 작은 귤이 재배되는 되는 섬, 아침이 되면 바닷가 작은 마을의 사람들은 마당과 도로에 쌓여가는 활화산의 분출물들을 치우기가 바쁘다. 유노히라(湯之平) 화산 전망대*로 가까이 갈수록 풍경은 점점 황량해지고, 마침내 검은 용암으로 뒤덮인 섬의 본 모습을 접하고는 발길을 돌린다. 위협적일 정도로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분연의 폭발음, 화산재는 얼굴과 옷자락에 스며들고 바람에 실려 마주보는 가고시마의 하늘과 해안 그리고 도시 윤곽마저 지워 버린다.

가고시마 북쪽의 야트막한 언덕, 시로야마(城山) 공원의 호젓한 산길을 오른다. 밑동이 큰 고목이 즐비하게 늘어선 숲 속을 걸어가면 한 세기 반 전장의 자취는 언덕길을 한 걸음 앞서 나간다. 가고시마가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의 기념비적 영역이라면, 시로야마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삶과 죽음의 중심이고 외고집 사무라이의 흔적들이 도처에 남아 있다. 전망대에 서면 발밑에 보이는 시가지 부두를 넘어 긴코만(錦江灣) 앞 바다에 우뚝 솟아있는 사쿠라지마, 멀리서 피어오르는 분연이 다시 하늘을 적신다.

메이지 정부가 사족(士族)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정책들을 추진하자 사이고 다카모리는 고향인 가고시마로 돌아와 세이난 전쟁(西南戰爭)을 일으켰다. 전투에 패하고 궁지에 몰린 사이고는 사쿠라지마가 보이는 시로야마의 작은 동굴에서 자결했다(1877년). 하급 무사로서 일취월장, 승승장구했던 젊은 시절이었지만, 메이지 유신의 와중에서 존왕양이(尊王攘夷)와 왕정복고(王政復古)라는 충심의 노력도 결국은 자신과 사족에 대한 배신으로 돌아온 일장춘몽의 거품인 것을…. 경천애인(敬天愛人)을 신념으로 했던 라스트 사무라이는, 전쟁의 회오리 속에서 경천도 애인도 행하지 못하고 긴코 만의 모래톱에 부딪히는 파도처럼 부서져 떠나갔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사쿠라지마의 사라진 벚꽃처럼 가고시마의 추억 속에 살아있는 전설이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이곳에 끌려와 정착한 조선 도공들의 잃어버린 고향의 꿈은 오늘도 가고시마 역사의 뒤안길에서 쓸쓸히 헤매고 있을 뿐이다.

붉은 빛깔의 스즈몬(錫門)을 들어서면 고풍이 깃든 이소(磯) 저택, 나지막한 뒷산을 배경 삼아 기와지붕 위로 하늘과 맞닿아 있고 단아한 목조 건물의 정취는 피곤한 여행자에게 마음의 쉼터를 제공한다. 나무와 바위, 석등과 정자가 잘 어우러진 연못, 저택 앞마당의 드넓은 잔디밭에는 어느새 긴코 만의 푸른 물결과 사쿠라지마의 웅장한 산이 들어와 있다. 시마즈(島津) 가문이 200년 이상 가꾸고 만들어 온 센간엔(仙巖園), 자연의 모습을 축소시켜 저택과 정원의 경관을 이루고, 사쿠라지마를 석가산(石假山)으로 긴코만을 연못으로 가정하여 조성한 일본 최고의 전통식 차경정원(借景底園)이다. 잔디밭에 앉으면 봄 햇살이 넘실대는 푸른 물결 너머로 눈에 와 닿을 듯 다가오는 사쿠라지마의 전경, 센간엔의 풍미는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만나는 거대한 화폭에서 우러나온다.

에도 막부의 영향에서 멀리 벗어나 있었고 이웃 나가사키의 외국 무역과 상업에 자극을 받아 비교적 개방적이었던 사쓰마번(薩摩藩)이었기에, 번주인 시마즈 가문은 아름답고 우아한 정원을 만들어 오랫동안 독자적인 지배 권력과 금력으로 자기만의 세상을 구축할 수 있었으리라. 에도 막부에 항거했던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와 같은 메이지 혁명의 인재들이 이곳에서 출현한 것도, 가고시마의 진취적이고 독립적인 정체성으로 본다면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닌 듯하다.

고유의 일본식 정원은 교목과 관목뿐만 아니라 바위, 모래, 언덕, 연못, 유수(流水) 등을 예술적으로 활용하여 정교하게 구성한다. 기하학적으로 배치된 서양식 정원과는 달리 일본정원은 가능한 한 인위적인 요소를 배제하여 최대한 자연에 가까운 경관을 조성하였다. 한국에도 담양의 소쇄원(瀟灑園)을 차경정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실제 소쇄원은 별서원림(別墅園林)으로서 주택, 정자와 함께 계곡과 숲은 동화된 자연 자체임으로 자연을 축소시켜 옮겨놓은 일본식 차경의 의미와는 큰 차이가 있다.

일본의 전통적인 방식과는 다르게, 물을 사용하지 않고 돌과 모래 등에 의해 산수의 풍경을 표현하는 가레산스이(枯山水) 정원도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눈에 보이는 상(像)을 좇지 말고 마음에 새기려함일까, 물이 없는 곳에서 물을 느끼고 상상하라는 선(禪), 무로마치(室町) 시대의 선종에서 영향을 받은 가레산스이는 도후쿠지(東福寺)나 료안지 등 사찰에서나 볼 수 있는 일본 정원의 독특한 양식이다. 비어있는 우츠(空)와 표상으로 나타나는 우츠츠(現), 우츠와 우츠츠의 세계를 우츠로이(移動)가 연결해주는 가레산스이의 세계, 센간엔의 가고시마는 이와 같은 선종의 모습이 무척이나 낯선 듯하다.

사이고 다카모리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인들에게 대단히 추앙을 받는 인물이다. 하급 무사 출신으로 권력의 심장부까지 진출하여 국가체제를 바꾼 혁명의 풍운아들이며 시대적 역동성을 상징한다. 하지만 또 다른 공통점은 한반도를 비롯한 대륙의 꿈으로 우리에게는 역사적인 악연의 원초적 단서를 제공한 자들이다. 임진왜란, 정한론과 한일병합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한국과 중국의 역사를 아시아적 가치로 폄하시킨 일본의 문화적 사대주의는, 태평양 전쟁 이후의 평화시대에도 일본 열도를 감도는 파고 속에 여전히 분출구를 찾고 있다.

가레산스이의 우츠와는 달리, 자연을 축소시켜 소유한다는 차경정원의 우츠츠는 뛰어난 예술적 풍미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의 해소할 수 없는 잠재적 욕구 본능의 표출일 수도 있다. 사쿠라지마의 벚꽃을 사라지게 했던 화산의 대폭발, 한 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미나미다케의 분진은 하루에도 몇 번씩 긴코 만의 바다를 먼지 안개로 가린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가고시마와 사쿠라지마 벚꽃의 추억, 일본인들에게 화산과 지진은 차라리 그들이 안고 가야할 역사적으로 숙명적인 존재인지도 모른다.

註釋 1) 규슈(九州) 가고시마시의 남쪽에 있는 화산섬, 생김새가 활짝 핀 벚꽃의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2) 관광객이 화산에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전망대, 섬과 바다를 조망할 수 있다.

3) 사쓰마번 무사 출신. 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와 함께 `유신삼걸(維新三傑)'로 불린다.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고 사족의 반란을 주도했다.

박송훈 <대한공공의학회 대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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