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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로지(牛老池)에서
우로지(牛老池)에서
  • 의사신문
  • 승인 2013.04.08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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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風書風〈18〉

유난히도 추웠던 겨울, 포근한 계절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우로지(牛老池)의 봄을 느껴보기도 전에 꽃샘추위가 먼저 기승을 부린다. 찬바람에 놀란 듯 오리 몇 마리가 갈대숲으로 숨어들고, 때마침 찾아온 황사(黃砂)는 멀리 보현산(普賢山) 자락의 희미한 윤곽마저 지워버린다. 매화, 목련, 개나리, 진달래, 벚꽃으로 이어지는 봄의 축제는 아마도 며칠은 늦어지리라. 그래도 봄볕은 공원의 양지바른 벤치에도 내리고, 놀이터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처럼 새싹은 발밑에서 소곤거리며 일어선다.

영천(永川)은 바람이 많은 도시이다. 사방으로 높은 산들에 둘러싸이고, 금호강 상류의 지천이 도심을 관통하며 낮은 평야지대를 이루는, 지형적으로 독특한 분지의 형태를 보인다. 그러기에 근접한 대구나 경주에 비해 겨울은 혹독하게 춥고 여름은 몹시 무더운 곳이다. 또한 일교차가 심하고 배수가 원활하여, 강을 중심으로 밀집해있는 과수원에서 사과를 비롯한 과일 재배가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자연생태공원 우로지는 영천시의 동북쪽, 금호강의 원류인 영천댐을 향하는 길목의 바람 많은 들판에 위치하고 있다.

팔공산(八公山)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북서풍이 금호강 노천(露天)의 남서풍으로 바뀔 즈음이면, 우로지 야트막한 언덕의 호수에도 바람은 계절의 변화를 알린다. 목조 교각 아래에는 연초록의 물풀들이 고개를 내밀고, 잔물결에 흔들리며 다리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올해의 첫 인사를 올린다. 못 둑길의 잔디밭 틈사이로 냉이와 쑥이 돋아나고, 물이 오른 벚나무 가지에는 꽃망울의 가슴이 터질 듯하다.

오늘처럼 꽃샘바람이 호수를 맴도는 날이면 희뿌연 황사의 안개 속에 불현듯 소년원 뒤뜰의 풍경이 스친다. 설익은 봄이 꽃샘추위 속에서 머뭇거리다가 갑자기 창문 밖이 환해지고, 망울을 터뜨리며 다가서는 하얀 속살의 목련 꽃잎들, 의무실을 나서면 정원의 개나리 펜스너머로 풍성한 꽃들의 미소…

지금은 직장이 바뀌어 주위 환경이 다르고, 출근길 금호강 강변도로와 영천 시가지에서 목련을 구경하기가 여간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꽃망울의 봄은 삭막한 계절의 차창 밖에서 기다림과 설레임으로 다가온다. 소년원 뒷마당에 만발해 있을 목련을 생각하면 우로지의 이른 봄나들이는 아쉽기가 그지없다. 그래도 홍매화 농원 사이로 한적한 오솔길을 걸어 호숫가 언덕에 서면, 싸늘한 날씨지만 사방으로 트인 하늘 공간과 바람 부는 과수원 들판이 한껏 마음을 넉넉하고 여유롭게 한다.

호수는 깊은 밤중에도 잠들지 않는다. 시골 도회의 희미한 가로등마저 불빛을 잃으면 보현산 하늘이 살포시 우로지에 내려온다. 하늘과 호수의 별들이 어우러지면 어디까지가 하늘이고 물인지, 별빛은 물결 위를 깜박이며 떠다닌다. 어두운 공간을 스쳐가는 바람의 외로운 발자국 소리, 별빛은 마른 나뭇가지와 풀잎 하나까지도 깨워가며 들판으로 달려간다.

우로지의 어둠은 눈에 보이는 것도 별빛이고 발에 밟히는 것도 오로지 별빛뿐이다. 한낮의 밝은 세상이 있다면 빛으로 충만한 밤의 세상도 있음을… 우리는 종종 어둠 속에 살아있는 빛과 생명을 잊어버리고 하루의 밝은 부분만을 지키며 살아간다. 별들이 떠나고 물빛이 돌아오는 새벽이 되면, 우로지는 비로소 선잠에서 일어나 봄볕아래 화사한 꽃들의 잔치를 준비한다.

산책길의 명상은 마음을 자유롭게 한다. 지친 일상을 벗어나 한참을 걷다보면 어느 듯 잡념은 사라지고 풍경만 남는다. 명상이라는 것도, 불교에서 말하는 참선(參禪)이라는 것도, 결국은 잡다한 생각과 욕심을 버리면서 자신의 겉모습을 지우려함이다. 마트료시카(Матрёшка) 러시아 인형처럼 한 겹씩 벗겨 가면, 보고 느끼는 풍경조차도 있는 듯 없는 듯 모두가 허허로운 상태가 된다. 고된 삶에 누적된 세월의 풍상도 채워온 만큼 버리고 비워야 함은 나에게 남은 시간과 연륜의 몫이 아닐까.

황사는 끝났지만 아직은 꽃샘추위로 썰렁한 우로지 공원, 돌아서는 빈 들판에 하늘 가득 벚꽃 이파리가 눈처럼 흩날린다.

박송훈 <대한공공의학회 대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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