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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환을 찾아 돌아본 인제 (2)
박인환을 찾아 돌아본 인제 (2)
  • 의사신문
  • 승인 2013.04.08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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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이 있는 정담〈91〉

박인환문학관 1층에 재현해 둔 1940년-50년대 서울의 거리. 당시 박인환이 문인들과 교류했던 곳이다.
인제는 전체 면적의 90% 이상이 산과 강입니다. 과거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 살기 힘든 이 땅을 떠나려 애썼습니다. 중등교육을 받고 면사무소에 근무하던 박인환의 부친도 아마 다른 아버지들과 마찬가지의 이유로 어린 나이의 아들을 서울로 보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계속 인제를 떠났습니다. 나라경제가 좋아지기 시작하던 1970년대 6만 명이던 인제인구는 1990년대 이후 반으로 줄었다고 합니다. 공장하나 없고 하다 못해 사람들 찾아와 놀다갈 변변한 관광시설도 없으니 그 때만 해도 인제는 참 매력 없는 옹색한 산촌이었습니다.

박인환문학관은 인제군청이 자리 잡고 있는 인제읍 상동리에 인제산촌박물관과 함께 있습니다. 박인환이 태어난 곳입니다. 충북 옥천에 있는 시인 정지용의 생가나 춘천 실레마을의 소설가 김유정 생가가 나름 충실하게 복원되어 있고 그 곁에 문학관을 운영하고 있는데 비해 여긴 그저 현대식 문학관만 덩그러니 있을 뿐입니다. 유리와 콘크리트가 주는 느낌이 조금은 위압적이기까지 합니다. 여기가 박인환의 생가가 있던 자리라고 하니 초가집 하나쯤 복원해 두었으면 조금은 더 정답게 느껴질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인제에서 박인환의 흔적은 이 박인환 문학관이 유일합니다. 옥천구읍이나 춘천의 실레마을과는 달리 길거리 어디에도 박인환의 흔적은 없습니다. 박인환은 이곳 인제에서 1926년에 태어나 1933년에 이곳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1936년 서울로 전학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가 남긴 작품에도 그의 고향 인제를 그리워한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김유정이나 정지용처럼 고향에 돌아와 무엇이든 흔적을 남기거나 아니면 그 작품에라도 고향의 모습을 담았다면 인제에서 박인환의 모습이 이렇게까지 사라지지는 않았을 듯합니다.

문학관 앞 잔디밭에 넥타이를 휘날리는 박인환의 상반신 상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비어 있는 그의 품속에 작은 의자가 놓여 있습니다. 들어가 앉으니 잔잔한 음악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세월이 가면'입니다. 노래가 끝나면 아마도 박인환의 대표 시 `목마와 숙녀'를 낭송해줄 듯합니다. 다 듣고 일어나기엔 3월 초의 날은 아직 춥습니다.

육중한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니 `박인환 시인 문학관'이 보이고 그 안은 어둡습니다. 여기 발을 들여 놓는 순간 사람들은 1950년대 서울의 밤거리에 서게 됩니다. 박인환 시인 문학관은 입구에 그의 짧은 연보를 빼고는 대부분 그가 시인으로 활동하던 1950년대 서울의 밤거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가 운영했던 서점 마리서사 외에는 대부분이 술집과 다방입니다. 위스키시음장으로 문을 열었다는 `포엠', 막걸리집 `유명옥', 봉선화다방과 모나리자, 동방싸롱, 은성 등…

마리서사라는 종로3가 낙원동 입구에서 시인 오장환이 운영하던 서점이었다고 합니다. 박인환은 아버지의 권유로 다니던 평양의학전문대학을 중퇴하고 서울로 돌아와 부친과 이모로부터 빌린 돈 5만원으로 이 책방을 인수했다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후 마리서사는 김광균, 김기림, 오장환, 장지용, 기광주, 김수영 등 여러 시인과 소설가들이 자주 찾는 문학 명소로 자리 잡으며 한국 모더니즘 시운동의 일어난 발상지 역할을 했습니다. 박인환에게 있어서 마리서사는 문단에 데뷔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기도 했습니다. 박인환은 마리서사를 인수한 이듬해 `거리'라는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발을 들여 놓았습니다.

오근식 <건국대병원 홍보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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