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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에서 만난 박인환 그리고 목마와 숙녀 (1)
인제에서 만난 박인환 그리고 목마와 숙녀 (1)
  • 의사신문
  • 승인 2013.03.25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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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이 있는 정담〈90〉

박인환 문학관은 강원도 인제에 있는 그의 생가 터에 자리 잡고 있다.
버지니아 울프라는 영국 작가가 우리의 귀에 친숙하게 된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일 것입니다. 1970년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이 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녀가 어떤 작품을 남겼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알음알음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작가라는 사실만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절망적 상황과는 다르지만 박인환 역시 절망의 20대를 보낸 시인임에 틀림없습니다.

해방과 전쟁을 겪으며 희망조차 보이지 않던 시대에 20대를 보내며 박인환은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만큼 어두운 절망을 노래했습니다. 그는 시집 한권을 남기고 1956년 서른 살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20년 만에 그는 많은 젊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박인환의 시에 등장하는 말들은 도회적입니다. `세월이 가면'에서는 이름, 눈동자, 입술, 유리창, 가로등, 사랑, 과거, 공원 등이 그렇고 `목마와 숙녀'의 술병, 문학, 버지니아 울프, 애증, 잡지, 통속 등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의 고향은 과거 산간벽지의 대명사였던 강원도 인제입니다.

1980년대만 해도 인제는 한 번 가보기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이곳 어디쯤에서 군 생활을 하고 있는 아들 얼굴 한번 보려면 버스를 갈아타며 강을 끼고 돌아 산길을 굽이굽이 넘으며 한 숨 한 번 쉬고 도착했던 곳이 인제였습니다.

군 생활 하던 시절 야간 행군 중 잠시 다리쉼을 하며 하늘을 보면 볼 때마다 하늘 모양이 달랐습니다. 높은 산봉우리들에 둘러싸여 앞뒤로 길어졌다가 둥그렇게 보이기도 하고 네모로 바뀌기도 합니다. 누군가 땅이 삼천 평이고 하늘은 오천 평이라고 했습니다. 정말 그렇게 보였습니다. 인제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다는 말도 그 때 들었습니다.

하물며 박인환이 태어나 자란 1920년대와 30년대는 오죽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인제 땅에 솟아 있는 설악산, 응봉산, 점봉산, 대암산, 방태산, 가칠봉, 가리봉 등 알려진 산은 물론 눈에 보이는 봉우리들은 대부분 해발 1000m가 넘습니다. 게다가 산과 산 사이에는 참으로 험한 물줄기가 흐르고 있으니 비라도 내리면 대부분의 촌락은 고립무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대처에 볼일이라도 있다면 어디가 끝인지도 모를 산길을 돌고 도는 고갯길을 넘어야 했습니다. 진부령, 미시령, 한계령, 곰배령, 박달령(단목령), 광치령, 군축령과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고갯길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땀과 한숨으로 얼룩진 고생길이었을 것입니다.

설악산 골짜기 곳곳에서 흘러내린 물길이 북천이라는 이름으로 흘러내리다 남쪽에서부터 북쪽으로 흘러내린 내린천과 합강에서 만나 소양강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박인환이 태어난 인제읍 상동리는 산기슭 평탄한 곳에 자리를 잡고 이 소양강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햇볕이 오래도록 잘 드는 이곳 남쪽으로는 군축령 너머까지 소양호의 긴 꼬리가 이어져 있습니다.

과거 서울 쪽에서 인제에 가려면 맨 마지막 관문이 소양강과 그 너머의 군축령이었습다. 그리 높지 않은 듯 보이지만 만만치 않은 길을 돌고 돌아 고갯마루에 서면 시야가 제법 탁 트이며 왼쪽으로 인제읍 시가지가 보입니다.

최근 들어 어지간한 고개마다 터널이 뚫리고 강위로 다리가 놓이며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지금 인제는 서울에서도 한나절 나들이 길입니다. 시원하게 닦인 서울 춘천간 고속도로에 접어들면 동홍천 IC까지는 불과 한 시간 남짓한 거리입니다. 다시 속초로 이어지는 국도를 갈아타면 여기서부터 인제까지는 30분이면 닿습니다. 거기에 박인환 문학관이 있습니다.

오근식 <건국대병원 홍보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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