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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의사회 창립 97주년 기념수필 - 동반(同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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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사신문
  • 승인 2012.11.30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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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호 <서울시의사회 고문>

개원 30년을 함께한 또순이 `미스안'의 쾌유 기원

김인호 고문
오솔길을 혼자 걷다 보면 점차 우울해 질 때가 많다. 릴케나 칸트는 깊은 사색으로 영감을 얻지만 우리들 산책에는 곁에 말동무 한명쯤 있는 게 좋고 그 때는 사사로운 대화라도 오랫동안 그것을 기억하게 된다. 하물며 인생을 같이 동행한다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인연이 아니다. 보통 남녀가 인생을 같이 간다고 하면 부부로서의 동반을 의미한다.

그러나 살아가며 그 동행하는 길에 따라 친구나 동료가 될 수도 있고, 동네 이웃이거나 유모, 가정부도 될 수 있다.

아내와는 별도로 나는 나의 진료실 `미스 안'과 지난 30년을 수레바퀴처럼 동행하였다. 그런데 일과 8시간을 하루 같이 살며 부대끼며 살아 왔던 동반자, `미스 안'과의 이별은 예기치 않게 갑자기 찾아 왔다. 그것은 이제 그녀와 내 인생이 이미 사양길로 들어섰음을 뜻 하는지도 모른다.

내가 `미스 안'을 처음 만난 것은, 30년 전 소아과 전공의 과정을 마친 후 스텝으로 종합병원에 근무할 때였다. 당시 삼십대 초반의 나로서는 미래의 진로로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결국 서울의 남동쪽 변두리 대단위 소형 아파트 단지에 개원하기로 결심하였고 가장 먼저 선배의 추천에 따라 소개받은 사람이 `미스 안'이었다. 그 때 `미스 안'은 18살이었다. 일시 이비인후과의원에 취업 중 소아과에 근무하고 싶던 차 나를 만났다고 했다.

당시 나는 대학병원에 근무하면서 대학원 박사과정 마지막 연구논문을 작성해야 하는 여건에서 한편 개원을 준비해야 하는 복잡한 상황이었다. 모든 준비와 일정을 아내와 그녀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우리 집에 같이 기거하며 생활하기 시작했다. `미스 안'은 매사가 분명하여 내가 시킨 일과 자기가 맡은 일을 정확하게 구분하여 마무리 하였고 책임감이 강하고 기억력이 뛰어 났다. 개원신고 등 일련의 행정 절차와 의료보험연합회 관련 문제까지 해야 할 일을 찾아서 하는 총명함도 있었다. 개원 초기, 학위과정을 마칠 때까지 4개월 정도를 야간 진료만 하였는데, 주간에 찾아 온 환자에게 차질 없이 재방문하도록 준비하였기에 나는 진료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그녀와의 동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의약분업이 안되어 개원은 요즈음과 달리 원스텝 진료였다. 진료 차트만 보고 주사와 약을 원내에서 주므로 환자들은 편했다. 나는 환자 진료 과정을 차트에 직접 기록으로 남겨 주기만 하면, 그 외의 모든 절차는 `미스 안'의 몫이었다. 접수부터, 진찰을 보조하고, 약을 분말로 갈아 포장하고, 주사까지 그녀는 날렵하게 처리해 주었다. 친절한 미소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또 진료가 마감된 차트 내용을 보험청구 지침에 따라 이중 먹지로 일일이 기록하고, 본인 부담금과 청구액을 정산하여 의료보험연합회에 청구해야 하였다. 말이 기록이지 환자마다 성명 주민번호부터 조제약 그람당 용량까지 일일이 적고 내원할 때마다 초 재진료, 처치료 등 모든 의료행위를 검증하여 계산기로 산정하는 업무는 다른 또 한 사람이 맡아서 해야 할 업무량이었다. 그러나 `미스 안'은 병원에서 밤새 혼자서 마무리 하였다.

그녀는 충청도 괴산 출신으로 2남 1녀 중 둘째로 중학교만 마치고 가난을 피해 홀로 상경하였다. 기식해 주는 식당에서 간호학원을 다녔을 정도로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하는 또순이 스타일이었다. 정식 개원 후 환자가 늘자 간호보조사가 4명이 되었을 때도 그녀는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 하였다. 청소만 해도 그렇다. 진료실 대기실 출입문등을 수시로 닦는데 묵은 때가 끼지 않도록 정성을 들였다. 후배 동료에게도 일처리를 그렇게 교육 훈련시켰다. 엄격한 규칙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후임자들은 스스로 떠나 버리기도 하였는데 갑작스럽게 일할 사람이 부족하여도 적당한 후임자가 정해질 때까지 본인이 그 몫을 대신해 버릴 정도였다.

체구는 작아도 아프지 않았다. 웬만한 감기가 걸려도 2,3일 만에 나아 일하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나는 진료를 마치면 의사단체와 사회활동에 관여하며 정신이 없었고, 한해 두해 별 문제없이 세월은 흘렀다. 한번은 유일하게 아끼던 `미스 안'의 남동생이 군에서 기갑훈련 중 탱크 채 익사한 가슴 아픈 일이 생겼는데 그 충격으로 한동안 그녀는 웃음기를 잃고 생동감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로인해 시골 어머니마저 앓기 시작하자 그녀는 병원에서 알부민과 링거액을 챙겨 내려가더니 며칠 밤을 지새우며 간병하였다. 그런데 야윈 얼굴로 피로에 지친 상태였지만 출근하였을 때에는 병원근무에 완벽하게 충실하여 나를 슬프게 또 놀라게 하였었다.

어머니가 죽고 홀로 남은 아버지가 폐기종을 앓을 때, 오빠와 올케가 큰 병원에 입원시키지 않는다고 상심해 하다가 토요일 오후 부리나케 내려가 직접 입원시키며 돌보았다. 담당의사와 수시 상의하더니 미심쩍거나 뭔가 결정할 때는 나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그런 행동을 보면 어릴 적 집 떠난 아픔과 후회를 생전에 갚으려는 집념이 오랜 기간 내재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

28세 되던 해에 그녀도 결혼을 하였다. 그 동안의 그녀 행적으로 보아 잘 살 것이라고 믿었다. 또 진심으로 행복해 지기를 기원하였다. 그러나 병원을 떠난 지 3개월 만에 다시 근무해야겠다며 찾아 왔을 때, 어처구니가 없어 처음에는 무시하였다. 그런데 남편 실직에 시어머니 관절염을 자기가 떠맡아야 한다며 울먹여 우리의 동행은 필연이 되어 또 다시 이어졌다. 그녀는 퇴직금과 은행융자로 소형 주택을 분양 받았다고 좋아했는데 출퇴근이 1시간 이상 걸리는 서울 북방 외곽이었다. 그래도 처녀 때와 꼭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일했다.

아들 하나만 낳고 그 아이에게 모든 정성을 쏟는 듯 보였다. 그 아이가 보균자인 그녀로부터 B형 간염을 수직감염 받더니 성인이 되어 만성 활동성 간염으로 진행되어 그것으로 군 입대할 수 없었다. 그때 그 원인이 그녀 탓인 것을 알고 죄책감에 시달리며 한동안 심각한 우울 증세를 보였다. 얼마 전부터 모니터 화면 볼 때 눈이 침침하다며 돋보기 안경을 끼기 시작했다. 복통이 자주 오며 빈혈이 왔다며 부인과를 가더니 자궁내막증으로 수술을 받았다. 그래도 병원 근무에 지장 없도록 진료가 끝난 후나 토요일을 택해서 치료 받았다.

개원 32년이 된 해, 나는 병원을 대로(大路) 건너 편 신축 8층 건물 2층으로 옮겼다. 60대 중반이 된 나이에 전자 진료 시스템의 스마트 클리닉으로 새 단장을 하며 이전하자 “원장과 간호조무사도 30년 넘어 낡았는데 건물만 이제 옮겨 뭘 하느냐?”며 주위 친구들의 비아냥거림과 만류가 많았다. 소아과 의사의 역할이 질병의 치료에서 정서교육과 예방으로 변화되면서 쾌적한 진료 환경이 필수였다. 음악이 깔리는 안정된 분위기에서 산뜻한 새 건물이 주는 신선함으로 `미스 안'도 생기가 돌고 병원 치장에 정성을 들였다.

오랜만에 찾아오는 환아의 부모가 우리 병원에서 치료받은 경험이 있어 할머니와 함께 방문할 때가 있다. 그러면 `미스 안'은 할머니를 금방 알아보고 “00어머니 아니세요!”하면 그 할머니도 “아니! 얘 아빠 어릴 때 주사 주던 그 사람이네. 아들이 스물아홉인데 아직도 여기 있우?!”하며 반가워한다. 긴 세월을 같이 한 이런 형의 진료실 대화는 내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며 여유롭게 해 주었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7월 초, 창 밖에는 장마 비가 줄기차게 내리고 있었다.

“원장님! 어떡하지요? 내일은 종합병원에 가 진찰 좀 받아야 하겠는데요” 좀처럼 이런 일이 없었기에 뜻밖의 요청에 깜짝 놀랐다. 그런데 이것이 `미스 안'과 우리 병원에서 나눈 대화의 마지막이었다. 그녀는 난소암이었고 입원, 수술과정으로 이어졌다. 검사에 갑상선 종양도 발견되었다. 그런데 기가 찬 것은 문병 간 나에게 “원장님! 이 치료 곧 끝난다니 다시 출근할 거예요!”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하지 않은가. 난 웃으며 “그래. 그래. 알았어. 몸이나 빨리 회복해!”하며 말했으나, 내심 그녀가 한심스럽기도 하고 한편 이유 모를 화가 솟구쳤다.

그녀 곁을 떠나며 나는 간호하는 아들을 불러내 “이젠 너의 엄마의 건강을 네가 지켜라. 다시는 일터로 나갈 생각이 들지 않도록 말이다! 죽도록 사랑하는 아들 너의 말은 그래도 들을 게야”고 다짐하며 그녀의 말년을 부탁했다.

다음 날, 구인광고를 내고 새로이 근무할 사람을 찾았다. 가능하면 신참을 교육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으나 그것은 내 바램 이었다. 스펙이 좋은 지원자는 여러 형태로 나를 실망시켰다. 내일 출근하겠다고 약속해 놓고 말없이 나타나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았다. 또 출근하던 조무사도 하루 이틀 근무하다 간다 온다 말도 없이 없어져 버린다. 느껴 보지 못한 세태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내가 한심해 지기도 했다. 한 달여 동안 채용하지 못하자 슬슬 미스 안이 다시 나올 수 없을까 아쉬워 졌다. 그토록 오랜 세월 이런 문제는 미스 안이 직접 해결해 왔기에 더욱 어려웠다.

나는 강하게 거부했다. 내 자신 어쩌면 `미스 안'을 위한 것이 아니고, 잠재된 이기적 욕구 때문인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기댄 세월만큼 요즘 젊은 세대의 구직(求職) 패턴에 난 이미 생경해 진 것이다.

기다려 보지만 그녀 같은 동반자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같이 살아 왔고, 같이 늙고, 같이 있었다는 것. 쉽지 않지만 감사할 세월이었다. 그녀의 빈자리가 너무 크다는 것을 그간 바람처럼 스쳐간 동행에서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아쉬움이 나를 쓸쓸하게 한다.

부침 속에서도 장족의 발전을 이룩한 서울특별시의사회 창립 97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김인호 <서울시의사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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