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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활자·게라지 첫 대면 35년전 신입 시절 그리워
납활자·게라지 첫 대면 35년전 신입 시절 그리워
  • 의사신문
  • 승인 2012.09.24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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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신문 5000호 기념 특집 - 주제Ⅱ : 의사신문과 나

강화일 전 병원신문 편집국 부국장

역대 기자로서의 나 - 강화일 전 의사신문 편집차장

지령 5000호. 매주 2회씩 5000번을 발행하려면 대략 50여 년이 지난 세월인가. 차곡차곡 쌓아온 의사신문 반세기가 참으로 대단하기만 하다. 지령 5000호 발행이라는 소식을 전해들으니 문득 의사신문 초년병 시절이 생각나 잠시 그 당시를 회상해본다.

의사신문에 입사한 때가 지령 몇 호였는지 잘 생각나지 않지만 34∼35년 전 4월 이었던가 싶다. 충무로 중구청 앞 옛 `시사통신'건물에서 의사신문을 처음으로 대면하였다.

그 당시는 납활자 시대. 내외경제(지금의 코리아 헤럴드)에서 인쇄를 했었다. `게라'라는 판 위 한 장의 물 젖은 교정지에 주욱죽 줄을 그으면서 잘못된 곳을 잡아내던 편집국장의 붉은 싸인펜, 인쇄잉크 냄새에 약간 거슬리기도 하였지만 정다운 `게라지'를 대하던 그때가 신입사원으로서의 첫 걸음이었다. 거꾸로 놓인 납활자를 줄줄 읽는 편집국장의 모습이 신기하기만 했었는데.

납활자를 보며 지내기를 몇 년 여. 그리고 납활자 대신 등장한 종이활자 `청타시대'. 기사가 많으면 소위 `빼다'(글자사이 간격 줄이기)라면서 예리한 칼날로 행간 사이사이를 잘라내고 붙이는 작업도 몇 년간 계속했던 것 같다.

뒤이어 등장한 컴퓨터 편집. 신문제작의 형태에 가히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컴퓨터 편집은 지금까지의 신문 모습을 통째로 바꾸어버린 크나큰 변화였다.

입사 2∼3년 후 지하 1층·지상 5층 커다란 강당까지 갖춘 서울시의사회 건물과 함께 시작된 당산동 시대.

지금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잠깐 대학로 어느 인쇄소에서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1년여를 지냈던 것 같다.

서울시의사회 당산동 시대. 필자가 변방이 아닌 편집에 직접 참여하며 본격적인 의사신문의 시대가 시작되었던 것 같다.

자체공장을 가져야겠다며 윤전기와 활자주조 시설까지 의사회관 지하에 갖추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한줌 추억이라기보다 무모한 도전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시작된 편집. 유능하던 편집부장이 한국전력으로 옮긴 후 어쩔 수 없이 맡게 된 편집과 신문제작,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만 하다. 최선을 다했지만 인쇄된 신문지면을 보면 미안하고 아쉬운 생각 뿐이었으니.


온 신경 곤두세워 편집마감 후 소주 한 잔에 정 나누던 낭만
나의 첫 직장 `의사신문' 역경 딛고 발전하는 모습에 뿌듯해


어느 해 12월 이었던가. 호기돈 편집인과 함께 종로 교보빌딩 뒤 골목길 피맛골에서 송년회를 한 후 집으로 돌아가다가 마포대교에서 꼼짝 못하고 몇 시간을 보낸 12.12사태. 의사신문 직원들은 시내버스 속에서 역사의 현장을 실감하기도 했다. 이후 신문 검열을 받으려 인쇄 전 물묻은 신문을 들고 몇 달 동안 서울시청을 들락거려야 했다.

당시 김재전 회장의 신년사에 7백만 서울 시민의 건강 교두보로 서울시의사회의 존재감을 일깨우곤 했는데 지금 서울특별시 인구가 얼마인가. 1천만이 안 된, 당시의 서울은 꽤 낭만적이었다. 신문제작이 끝나면 기다렸다는듯 시작되던 뒤풀이 겸 소주 한잔, 오탈자 없이 무사히 끝내기를 기다리며 마시던 술 한잔이 편집하면서 가졌던 모든 긴장을 풀어주었다.

고정컷·얼굴 사진 모두를 동판으로 만들어 올렸는데 그것들이 바뀔까봐 가슴 졸였던 때가 엊그제 같다. 인쇄된 신문을 보며 막걸리, 소주, 맥주 세 가지를 타서 마시던 그때. 나이드신 문선공들과 어울리던 그때가 지금도 그립기만 하다. 당시엔 회관 근방 식당에서 외상술도 먹을 수 있었는데….

1980년대 중반 현재의 서울시의사회관 지하실에 마련된 인쇄공장에서 김청만 당시 의사신문 부장(지난달 초 별세)과 강화일 편집부 차장(사진 좌측 끝)이 게라지 인쇄를 위한 문선작업을 지켜보고 있다.
서울시의사회 기관지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다져온 의사신문. 의료계의 여망을 대변하고 고충을 널리 알리면서 회원권익 옹호의 임무를 다하고 있는 의사신문. 입사 때의 의사신문은 화려한 필진과 내공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의료계 전문언론으로서 촌철살인의 정론을 펴는데 한치의 오차도 없었다.

신문을 펼치면 첫 면에 시작되는 `무영등'. 800자 내외의 글 속에 당시의 의료현실을, 부당한 의료정책들을 꼬집고 의료계 여론을 선도해 나갔었다. `사자성어'와 역사 속의 고전들을 인용해 써내려 간 무영등은 그 자체가 일종의 `사설'이었다.

그 다음면에 등장하는 `의가흑백', 취재현장에서 보고 느낀 기자들의 생생한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보건의료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잘못된 것을 들춰내고 외둘러 꼬집은 일종의 `가십'. 서울시의사회원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준 `카타르시스' 역할도 하지 않았던가 생각된다.

`행림소필', `진료실 주변' 등 다양한 필진을 등장시켜 진료현장에서의 일상사를 풀어놓게 했었다. 이외에도 `행림시단', `수필 릴레이', `의창에 흐른 세월', `생활의 지혜 어떻게 살 것인가' 등 의료문화 창달의 역할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신문 제일 가운데 면을 차지했던 `지상총의'. 다달이 주제를 정해 보건의료계 전반의 문제점을 토론한 지상총의는 의료계 여론의 결집장이었다.

의료계 신문 유일 `해외의학'난을 비롯 `병의원 어떻게 꾸며야 할 것인가', `임상가를 위한 신약정보', 사진으로 보는 `포토뉴스'까지 의사신문은 볼거리 읽을거리로 충만했었다.

매주 계절에 맞는 사진과 함께 게재된 `금주의 메모', 매달 의료인들이 빠뜨리지 않고 해야 할 일들을 짚어준 `월별 설계' 등 월·목 주 2회 발간한 의사신문은 백화난만,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당시 의사신문이 선정한 1980년 의료계 주요뉴스를 보면 전두환 대통령 취임 전후의 의료계 현실을 약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1980년 8월 전두환 대통령 취임과 함께 한 △전국 의료계 자율정화물결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1년간 개심술 4백례 △한미합동학술대회 △강동·구로구의사회 창립 △WHO, 고대 바이러스병연구소를 출혈열 연구소로 지정 △WHO후원 보사부 지원 전국암관리사업 금년부터 시작 △병원 표준화 사업 △진료방해 보호자를 만류하던 의사 사망 △서울대병원 의공학팀 인공췌장 개발 성공 △환경청 신설 △아시아 가톨릭의학협회 총회 △강남성모 지역사회 종합의학센터로 개원 △서울대 병원연구소 발족 △의보진료비심사위에 개원의 대폭 참여 △10년만에 콜레라 발생 △경상대 등 3개 의대 신설, 정원도 대폭 늘려 등, 주요 뉴스 면면을 살펴보면서 80년대 시작과 함께 의료계도 조금씩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지 않았나 내 나름대로 생각해 보게 된다.

1960년 4월 창간 후 50년을 넘어 새로운 50년을 열어가고 있는 의사신문.

보건의료정책에서 `엔터테인먼트'면 People(동정)난과 구의사회 소식, 학술·기자수첩, 산 이야기에서 환자와의 소통방법, 의사들이 알아야 할 법률지식, 병의원 탐방·제언 등 반세기를 넘어 50년 후를 바라보는 의사신문의 발걸음은 “일취월장하는 의학을 연구발표하여 회원간의 지식을 개발하고, 선진의학계와의 지식 교환으로 문화적 교류를 목적으로 하여…” 50년 전 의사신문의 발간 취지를 그대로 이행하고 있다. 이제 5000호의 역사는 국립중앙도서관에 마이크로필름으로 보관되어 의료계 50년 흐름을 되돌아보게 해주고 있다.

나의 첫 직장이었던 의사신문, 그래서인지 남다른 애정과 관심으로 지켜본 의사신문. 시대적 격랑 속에서 숱한 고난과 역경을 딛고 발전을 거듭, 50년을 지난 지금 대한민국 일등 의료전문 언론으로 우뚝 선 의사신문, 지난 반세기가 그러했듯이 앞으로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의료계 전문 언론지로서 촌철살인의 정론을 펴기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해줄 것을 다시한번 간곡히 부탁드린다.

아듀! 의사신문이여 영원하라!

강화일 (전 병원신문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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