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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한명 없이 의료정책 세우는 이상한 세상
의사 한명 없이 의료정책 세우는 이상한 세상
  • 의사신문
  • 승인 2012.09.24 10:2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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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신문 5000호 발행 기념 수필 - 의사는 `의사나라 국민'일까?

신종찬 의사수필가협회 홍보기획이사 도봉·신동아의원장

서울특별시의사회의 기관지인 의사신문이 국내 주간지로는 처음으로 지령 5000호를 발행한다.

서울시의사회원뿐만 아니라 전 의료계가 경하할 일이다. 의사신문은 지난 1960년 4월15일 `서울시 의사주보'로 출발하여 의사신문으로 개명하였고, 반세기 넘게 의사들과 동고동락하며 애환을 달래 왔다. 위기에 처한 현재의 의료계의 문제점을 짚어보고자 한다.

우리나라는 경이적 발전을 거듭하여 정치 민주화를 이룩하였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는 세계 10위권 국가가 되었다. 한국정부가 또 자랑하는 것이 건강보험제도이다. 세계적으로 값싸고 질 좋은 제도라고 홍보하고 있다. 첨단의료 분야도 선진국 수준이다. 객관적인 통계로 보아도 그럴만하다. 해방 직후 40세 전후였던 평균수명이 현재는 약 80세에 이르렀다. 홍역, 볼거리, 풍진, 콜레라, 장티푸스 등 전염병은 선진국 수준으로 관리되고 있다. 폴리오(소아마비)는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현재의 한국 의료제도를 정부가 말하는 대로 자랑해도 되는지, 내실있는 제도인지를 냉정하게 재평가해야 할 시기일 성 싶다.

먼저 건강보험제도가 앞으로도 현재와 같은 수준을 유지할 수 있을지를 알아보자. 의료문제를 잘 아는 전문가들의 의견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현재 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의사들의 일방적인 희생의 토대 위에서 건강보험제도가 유지되어 오고 있기에, 이러한 희생이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우선 응급실 전문의 당직법을 살펴보자. 현재와 같은 낮은 수가로 모든 응급실환자를 전문의가 진료한다는 것은 꿈같은 일이다. 이 법을 입안한 공무원에게 묻고 싶다. 전공의 시절 응급환자를 담당해본 경험없이 어떻게 전문의가 될 수 있을까? 탁상공론의 전형이다.

포괄수가제로 의료행위에 고정된 금액만 포괄적으로 받는다면, 의사는 굳이 고가의 질 좋은 진료와 약을 쓸 필요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최선의 진료보다는 최소한의 진료를 할 것이 분명한데 정부는 질이 낮아지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고 억지를 쓴다. 정부는 또한 의료수가는 종합병원이 찬성하고 있으니 적정하다고 주장한다. 이 수가는 현재 전공의에게 주당 100시간이 넘는 가혹한 불법노동을 시키는 종합병원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이하 건정심)의 구성 문제는 더 심각하다. 우리나라는 모든 의료기관이 건강보험 환자를 진료하도록 법으로 강제지정하고 있고, 중요한 보건정책은 거의 건정심에서 결정한다. 건정심은 노동자, 경영자, 시민단체가 포함된 가입자 대표 8인과 의약계 대표 8인, 정부와 정부가 임명하는 전문가로 이뤄진 공익대표 8인, 총 24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구성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의약계 대표 8명 중 순수의사대표는 4명 정도이다. 나머지 구성원은 모두 정부(보건복지부)가 직간접적으로 정하게 되었다. 구성원이 이러하니 모든 정책의 결정은 보건복지부 공무원의 뜻대로 될 수밖에 없는 구조이고 또 그래왔다.

의약분업사태 이전에는 노사정위원회 등 다른 공공정책 의사결정기구처럼 공급자인 의료계와 수요자인 정부대표와 소비가 단체가 같은 수로 구성되었었다. 의약분업사태를 겪으면서 의료계가 정부시책에 반대하자 소위 괘씸죄에 걸려 이렇게 비민주적으로 바꾸어졌다. 유신독재체제에서 집권당이 전체 국회의원의 1/3을 지명한 것보다 더 심한 독재가 바로 건정심인 것이다. 의약분업을 주도한 정부가 이 건정심을 만들었고, 현 정부도 집권하면 모순된 의료정책을 바꾸겠다고 한 약속을 지금까지 고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집권세력이 제도를 고치려다 시끄러워지는 것이 싫은 것이 첫째요, 자리와 권리만 탐낼 뿐 일은 쉽게 하고 싶은 행정공무원들의 집단이기주의가 둘째일 것이다.

의약분업사태 때 어수선한 틈을 타서 의료계에 내려진 날벼락이 또 있다. 보건복지부 내에 의사당연직으로 보직해 오던 의정국장과 보건국장 자리를 폐지한 일이다. 보건복지부의 전신인 보건사회부는 보건부와 복지부가 합쳐져 만들어졌다. 그 이후 보건사회부나 보건복지부 장관은 의사가 아닐 때도 많이 있었지만 적어도 서열 2위인 차관이나 3위인 기획관리실장은 의사로 보직하였다. 안타깝게도 마지막 보루로 남아 있던 의사당연직 국장자리 2개가 폐지되었으니 그 아래에 있던 의사공무원들은 보건복지부 본청에서 밀려나 질병관리본부라는 힘없는 곳으로 가게 되었다. 대신 의료정책실을 만들어 일반 행정직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의료 전문가인 의사는 의료정책에 얼씬도 못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보건부 장관 이어 의정·보건국장도 행정 공무원이 맡아
대한민국 국민에서 의사는 배제된 채 희생·봉사만 요구
의학에 전념한 죄…사회와 소통하는 데 더욱 노력해야


모든 분야에서 민주적 제도를 갖게 되었으나, 유독 의료정책 분야는 이에 역행하고 있다. 마치 법무부 본청에 변호사 출신이 하나도 없고 법무행정은 행정직이 맡아보는 것과 같다. 이런 불합리한 제도를 만든 사람들은 의사가 행정능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변명한다. 그렇다면 세계보건기구에서 수장으로 훌륭한 업적을 남긴 이종욱 박사를 비롯한 여러 한국인 의사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더구나 현재 의사출신이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의사에게 의료정책을 맡기면 의사만 위할 거라 우려하는 말도 있다. 그렇다면 현재 국방부의 중요한 보직을 군인이나 군 출신이 차지하고 있다하여, 국방부가 군인만 위한 정책을 펴고 있는가? 다른 선진국처럼 의료정책은 당연히 의사가 담당해야 할 것이다. 해방 이후 50여 년간 의사출신들이 6·25동란 등 여러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잘 해오지 않았던가.

답답한 이 현실이 오늘날 한국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19세기말 인간의 모순을 소설작품으로 예리하게 파헤쳤던 카프카는 그의 대표작 `시골의사'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속았구나! 속았어! 처방전을 쓰는 것은 쉬우나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하기는 어렵다. 세상은 언제나 불가능한 것을 의사에게 요구한다.” 시골의사는 저항하기를 포기한다. 치욕을 당하면서도 자신은 숭고한 사람이니 우월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외친다.

그 때도 사람들과 소통하기 어려웠다. 현재 한국의 의사들에게도 책임은 무겁게 부과하지만, 그 책임을 완수하기 위한 지원을 요청하면 카프카의 `시골의사'에서 처럼, 잘사는 배운 자들이 더 잘 살려고 엄살을 부린다며 의사를 홀랑 벗겨 눈밭으로 내던져 버리고 있다.

최근에 정부는 언론을 동원하여 무리한 논리로 의사를 공격하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다. 그럴 때면 내가 한국인이 아닌 `의사나라 국민'인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 원인은 카프카가 지적한대로 의사들이 사회와 소통하는데 부족한 결과가 아닐까. 사회와 소통하려면 의학만 공부해서는 안 되고 인문학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한 채 의술만 뛰어나면 고급기술자에 불과할 것이고,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으니 의사가 의료의 주체는 결코 될 수 없을 성싶다. 의료계도 국민의 사랑을 받도록 애써야 할 것이다.

향후 정부도 참된 의료를 원한다면 의료제도를 민주적으로 고쳐 의사들이 안심하고 진료할 여건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실력있고 성실한 의사는 나라의 소중한 자산이다. 한 번 무너진 의료기반은 성수대교처럼 금방 다시 세울 수도 없을 것이다. 의사도 한 사람의 생활인이다. 히포크라테스선서를 했다고 하여 모든 의사가 이태석 신부처럼 자신을 희생하며 봉사하기를 바랄 수는 없지 않을까.

히포크라테스선서는 의료를 인류최고의 가치로 받들며, 비록 적이라도 인류애로 보살피자는 것이지 권력자가 시키는 대로 하겠다는 맹세가 아니다.

오늘도 정부는 힘들고 사고 위험이 높은 진료과에 전공의들이 지원하기를 기피하니 의사수를 늘려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 이 문제는 그 원인을 해소하는데 초점이 맞춰져야지 엉뚱하게 의사 수를 늘린다고 해서 절대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의사신문'은 의료전문 언론으로서 이런 시시비비에 과감한 정론으로 맞서주길 바란다. 그러나 그 일이 의사들만을 위하고 진정 국민과 국가의 미래를 위한 일이 아니라면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신종찬 (의사수필가협회 홍보기획이사, 도봉·신동아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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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2012-10-04 12:58:14
좋은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