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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한인사회에 봉사한 신경병리학자 - 송선규 
재미 한인사회에 봉사한 신경병리학자 - 송선규 
  • 의사신문
  • 승인 2012.06.07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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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한인의사 위상 제고 및 한국과 활발 교류 기여

송선규(宋璇圭)
송선규(宋璇圭)는 1927년 인천 태생으로서 5년 간 기차 통학으로 힘들게 경기중학교를 졸업하고 1945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당시 아사히의전)에 입학하여 1949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학생 시절에는 `총대'로서 동기 클래스를 대표하여 복잡하였던 학교, 그리고 교수들과의 교섭을 잘 마무리하며 전체 클래스 동료들의 총애를 받았다.

졸업 후 세브란스병원에서 인턴십을 마치는 동안 한국전쟁을 겪었고, 9·28 수복 후에는 유엔군에 복무하여, 미8군의 제4, 제14 야전병원에 배치되었다. 그는 특히 영어에 능통하고 조직력과 행정에 재주가 많아 미행정당국과 우리 한인 사이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부산 후퇴 후에는 미군병원에서 세브란스와 서울의대의 많은 교수들에게 잠시나마도 많은 편리를 제공했다.

그 후 주로 미8군이 운영하는 부산의 민사처병원에서 근무하면서도, 영어실력으로 미월간지 `리더스 다이제스트'지를 번역 출판하는데 참여하였다. 1952년 무렵 우리 한국 의사들 사이에는 미국 유학연수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여 송선규는 그 영어 재간으로 허다한 동료의사들에게 편리를 제공하였다.

휴전 협정이 체결되기도 전에 힘들게 미국행 출국허가를 얻어 1953년 부산을 떠나 도미하여 매사추세츠주의 스프링필드병원(Springfield Hospital)에서 인턴십을 1년 만에 마치고 뉴욕시에 있는 마운트 사이나이 병원(Mt. Saini Hospital)에서 신경과 레지던트 3년 훈련을 마치고, 신경병리 펠로십을 거쳐 마운트 사이나이 의과대학의 신경병리학교실 초기 조직 시대부터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 교실에서 30여 년에 걸치는 교직생활을 별세할 때까지 계속하였고, 특히 학생지도에 여러모로 많은 힘을 썼다. 선생은 이 교직생활 중 수많은 신경병리 논문을 집필하였고 특히 에타놀이 미치는 뇌세포조직의 변화(Ethanol effect of brain tissue)에 대한 연구실적을 올렸다.

1950∼60년대에는 뉴욕시내에 살면서 우리 한인 교포사회, 특히 한인 의사들을 위한 그의 공로는 특기할 만하다. 그리고 재미 세브란스의대 동창들을 위한 그의 노고는 절대적이었으며, 그 동창회 조직은 선생의 노력 없이는 조성되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선생의 그 헌신적인 노력, 그리고 그 능숙한 행정력의 덕분으로 동창회는 초창기의 많은 고난을 넘겼으며 그의 노력은 800여명에 달했던 동창들의 환영과 인정을 받았다.

1970∼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선생은 교포사회를 위한 활동을 확대하기 시작하여 의사회뿐만 아니라 경기중학동창회, 그리고 또 다른 단체에서도 그의 조직력, 적극성 그리고 능숙한 행정력을 인정하여 그를 초빈, 환영하여 회장직을 많이 맡았다. 그의 사심 없는 노력은 모두 인정하여 여러 기관에서 그 참여를 간청하였다. 1970년대에 있었던 한미합동의사회 학술대회는 선생의 조직력과 희생적인 행정능력을 활용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성공적인 모임을 이루었다.

그 후에 4000여명의 회원을 가졌던 재미한인의사회(KAMA)에서 선생은 여러 부서에 활동하였고, 그는 결국 그 조직의 회장직을 맡으면서 특히 후세 발탁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5세·2세의 한인계 의료종사자의 참여를 권장하기 시작하였으며 수천 명에 달하는 2세 의사가 참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선생은 평생 뉴욕시와 그 근교에 살면서 미국을 방문하는 한국 의료계 인사들을 도맡아서 안내하다시피 하여 뉴욕의 케네디공항을 자기 집 드나들다시피 하면서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1960년대에는 연세의대 본교와의 통신도 순조롭지 못하여 많은 우편물은 케네디 공항을 통해 손수 운반하고 그를 손수 우송, 배부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이런 헌신적인 노력과 수고를 모든 재미동창회원들이 진심으로 감사하였고 선생의 아쉬운 타계 소식을 접한 회원들은 그의 메모리얼 펀드(Memorial fund)를 조성하여 모금 운동을 적극 추진하여 금세 수만 달러에 달하는 금액을 모금하였다. 이 펀드를 이용하여 해마다 열리는 재미 연세의대 재상봉 학술대회에 `송선규 메모리얼 강의(Memorial Lecture)'를 개최하여 국제적인 저명인사를 초청하고 있는데, 제일 처음 초청된 인사는 필라델피아에 있는 제퍼슨 의대 학장이었다. 지금까지 15여 년간을 계속하고 있는 아름다운 행사가 되고 있다.

아쉽게도 선생은 1993년 66세에 지병으로 타계하였고, 부인 김상희(서울 여의대 출신)와의 사이에 1남 2녀를 두었다.

집필 : 정내관(재미 외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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