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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해안도로 풍경
제주도 해안도로 풍경
  • 의사신문
  • 승인 2012.05.23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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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해안도로 풍경 사진
축축하면서도 시원하고 그 속에 은근한 향기까지 머금은 비자림의 산들바람 속을 천천히 걸으며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가득 들어와 마음속을 충만하게 채우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산책로 끝자락에서 마주친 새우란 꽃송이들은 어쩌면 잊히지 않을 특별한 기억을 남겨주었습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며 낮은 햇살을 뻗치고 있습니다. 아직 해가 저물기 전에 해안가로 가서 바다를 보기로 했습니다. 비자림을 나서기가 조금 서운합니다. 다시 올라가서 새우란, 그 수수한 꽃을 다시 한 번 더 보고 싶기도 합니다. 아쉬움을 남겨두기로 했습니다.

동쪽으로 천천히 차를 몰았습니다. 길은 옆의 풀과 나무들이 싱그럽습니다. 가장자리에 돌담을 두르고 있는 밭 여기저기에 농사를 시작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흔적이 더러 보입니다. 그런데 도통 사람이 없습니다. 오후 늦은 시간이어서 모두 집에 돌아가 저녁준비를 하고 있으리라 생각하며 스치는 바람을 만끽합니다.

딱히 어디를 가려고 하지 않으니 바다가 있는 쪽으로 가기만 하면 됩니다. 빨리 갈 필요도 없습니다. 뒤에서 빨리 가기를 채근하는 차들도 없어 마음은 한 없이 한가합니다. 평대리라는 곳에서 잘 닦여진 널찍한 일주도로를 만났지만 그대로 가로질러 초등학교 옆길을 따라 작은 길을 계속 가보니 바다가 떡하니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해안선을 따라 해맞이 도로가 꼬불꼬불 이어집니다. 성산 일출봉 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바다가 좋습니다. 길도 조용합니다.

꿈을 꾸듯 가다가 문득 왼쪽에 여유 있는 잡초지가 보였습니다. 주차를 하고 바닷가로 나가 손끝에 다가오는 바닷물을 느껴봅니다. 이곳 바닷가 돌은 검고 울퉁불퉁합니다. 바위를 골라 바다를 향해 앉았습니다. 바다를 한 아름 안았습니다. 물이 맑고 바람도 맑으니 가슴까지 그 맑음이 차오릅니다. 해는 더 낮아져 곧 질듯합니다. 오늘 저녁 묵을 숙소도 정하지 않았는데 마음은 천하태평입니다.

바람이 점점 싸늘해져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성산일출봉 근처 어디에서 묵으려합니다. 시동을 걸고 출발하려는데 저 앞에 돌 틈에 뭔가 보입니다.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려 가까이 가 보니 문주란입니다. 돌과 시멘트뿐인 삭막한 그 곳 돌 틈바구니에서 문주란이 처절한 모습으로 그 위 도로를 향해 머리를 내밀고 있습니다.

여러 해 전 거기에 자리를 잡은 듯합니다. 꽤 크게 자랐습니다. 다만 바람과 추위에 잎은 크게 자라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잎도 쪼글쪼글 주름이 졌습니다. 워낙 건조한 바위틈이라 새 잎이 자라날 때 제대로 펴지지 않은 탓입니다. 아마도 물을 찾기 위해 저 돌 틈 깊은 곳까지 뿌리를 뻗고 있겠지요.

조금 더 따뜻해지고 비가 몇 번 더 스며들면 아마도 꽃을 피울지도 모릅니다. 올해는. 어쩌면 지난해에도 지지난 해에도 꽃을 피우고 그 풍만한 향을 뿌렸을지 모릅니다. 아무쪼록 도로 옆의 잡초로 여겨 뽑아버리지 말고 살 때까지는 거기서 살도록 두면 좋겠습니다. 하필 거기에 자리를 잡은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니.

오근식〈건국대병원 홍보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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